[靑山別曲]<13>경북 청도 섬유회화 작가 남춘모

  • 입력 2003년 12월 10일 18시 33분


싸구려 천 조각들을 가공해 세련된 화면을 만들어 내는 남춘모씨. 폐교를 빌려 작업실로 쓰고 있다. -청도=허문명기자
싸구려 천 조각들을 가공해 세련된 화면을 만들어 내는 남춘모씨. 폐교를 빌려 작업실로 쓰고 있다. -청도=허문명기자
경북 청도는 한국에서 몇 안 남은 청정지역이다. 국도를 지나면서 봐도 그 흔한 모텔이나 가든 간판 하나 보이지 않고, 옛 농촌 풍경 그대로다. 청도군 끝자락에 자리 잡은 각남면 옥산3리 대천초등학교. 화가 남춘모씨(42)의 작업실이 있는 폐교다.

교실을 개조한 작업실로 들어서니 한편에 색색의 천들이 줄줄이 걸려 있어 마치 포목점 같다. 섬유를 이용해 ‘부조 같은 회화’ 작업을 선보이는 작가의 산실(産室)이다. 싸구려 천 조각들이 작가의 손을 거쳐 화사하고 세련된 캔버스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는 한 달에 두 번 대구 대신동 서문시장을 샅샅이 훑어 구입해 온 천들을 폭 4cm로 길게 잘라 나무틀에 고정시킨 다음 묽게 희석시킨 투명 폴리에스테르를 붓으로 살짝 칠해 말린다. 수공으로 이뤄지는 작업은 엄청난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작가는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라고 말하지만 그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엄청난 집념과 에너지를 보면 겸사로 들린다.

경북 영양 산골에서 태어난 그는 고교 졸업 후 생활고 때문에 대학도 못 가고 3, 4년동안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혹독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러다 우연히 책 팔러 화실에 갔다가 ‘나도 하고 싶다’는 의욕이 솟아났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계명대 서양화과에 들어가 대학원을 마친 그는 이후 정말 열심히 그렸다.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번잡한 인연들에 얽매여 자신이 해이해져 있음을 깨닫고 홀연 독일 부퍼탈로 떠났다. 무작정 도록 하나 들고 화랑을 순례했고, 현지 화랑에선 그림만 보고 그를 받아주었다. 개인전을 두 차례 열었다. 2년 뒤 자신감을 얻고 귀국했지만, 서울은 그에게 냉대와 무관심으로 답했다.

‘불러주기 전까진 (서울)근처에도 기웃거리지 않겠다’는 각오로 오로지 작업에만 매달리기를 10년. 그는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회화의 복권’ 3인전의 작가로 선정되면서 비로소 서울 무대를 밟는다.

남들이 주목하지 않던 10여 년 동안 그는 오로지 작업만 생각했다. 흑백으로 가득했던 화면은 점차 화려해졌고 나염천을 이용한 작업을 시작했다.

“감나무만 해도 1년에 색깔이 수십 가지로 변합니다. 봄 여름에는 작업 안 해도 하염없이 좋아요. 인상주의 작가들이 빛에 주력했듯 나도 어떻게 하면 현대적 색으로 빛의 변화를 추구할까 고민했지요. 이 격리된 공간에서 철저히 나 혼자였지만 나태할 틈은 없었어요.”

서양화가이자 절친한 그의 친구인 최선호씨는 “아무리 더운 날이나 추운 날에도 그에게 전화를 걸면 ‘작업하고 있다’는 건조한 대답이 돌아와요. 그러면 나까지 정신이 퍼뜩 들지요”라고 전했다. 그토록 화사하고 모던한 화면 뒤에 감춰진 사투(死鬪). 청도 작업실을 나올 땐 그의 화면에서 섬뜩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작가는 산삼처럼 살아야 해요. 땅 속 깊은 곳에 파묻혀 모든 에너지를 응축해 심마니가 자기를 발견할 때까지 기다린다는 심정으로,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청도=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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