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자비]<39>나를 흔들어 깨우는 '선방 일기'

  • 입력 2003년 12월 11일 18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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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바람이 일더니 해질 녘부터는 눈발이 날렸다. 첫눈이어서 정감이 다사롭다. 오늘도 선객(禪客)이 여러 분 당도했다…어둠이 깃드니 무척이나 허전하다. 세속적인 기분이 아직도 소멸되지 않고 잠재되어 있다가 불쑥 고개를 치민다. 이럴 때마다 유일한 방법은 화두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선객은 모름지기 고독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한다는 것, 그 자체만도 벅찬 일이기 때문이다…누구보다 비정하기에 다정다감할 수도 있다. 누구보다도 진실로 이타적이기 위해서는 진실로 이기적이어야 할 뿐이다. 모순의 극한에는 조화가 있기 때문일까.’

김장 울력(스님들이 함께하는 공동작업), 결제, 선방의 생태, 선객의 운명, 본능과 선객, 용맹정진, 별식의 막간, 열반에 이르는 길 등 23개의 주제로 수행자의 일과를 적은 지허 스님의 ‘선방일기’는 내가 강원 춘천에 갔을 때 장익 주교님으로부터 선물받은 소책자인데 언제 읽어도 감칠맛이 있다.

1973년 ‘신동아’ 논픽션 당선작이기도 했던 것을 내용이 하도 좋아 단행본으로 엮었다고 한다.

‘그믐이다. 삭발하고 목욕하는 날이다… 날카롭게 번쩍이는 삭도가 두개골을 종횡으로 누비는 것을 볼 때는 섬뜩하기도 하지만 머리카락이 쓱쓱 밀려 내릴 때는 시원하고 상쾌하다. 바라보는 것과 느끼는 것의 차이 때문이다.’

‘오후 1시가 되자 시간표에 의해 동안거(冬安居)의 첫 입선(入禪)을 알리는 죽비소리가 큰 방을 울렸다. 각기 벽을 향해 결가부좌를 취했다. 고요했다.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이 삼동에 견성하겠다는 소이에서일까. 그 외양은 문자 그대로 면벽불(面壁佛)처럼 미동도 없다. 그러나 그 내양은 어떠할까. 인간의 복수심과 승리욕은 밖에서보다 자기 안에서 더욱 가증스럽고 잔혹하다.’

매우 솔직담백하면서도 구도자의 깊은 사색과 예리한 성찰이 돋보이는 수행일기를 읽고 나니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내면을 흔들어 깨우는 느낌이다. 꼭 불자가 아니라도 이 책을 새겨 읽고 우리 모두 각자의 삶의 도량에서 청정한 눈빛을 잃지 않도록 매일의 ‘선방일기’를 써 보면 어떨까.

이해인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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