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저널리스트 로저 피들러는 저서 ‘미디어 모포시스’에서 미디어가 공동진화(coevolution), 수렴(convergence), 복합성(complexity)이라는 3C 개념을 따라 변화한다고 갈파했다.
한때 TV에 왕좌를 내 준 것처럼 보였던 라디오가 최근 최첨단 디지털 기술을 초스피드로 흡수하며 진화하는 모습은 흥미롭다.
10, 20대가 주 타깃 청취자층인 SBS 라디오 러브 FM(107.7MHz) ‘하하·몽의 영스트리트(매일 오후 8시∼10시)’가 생방송되는 서울 여의도 SBS 스튜디오를 10일 찾아갔다. 라디오는 더 이상 느림과 침묵의 ‘노스탤지어 미디어’가 아니었다.》
○ 라디오를 ‘보다’
중장년층에게는 이름이 생소한 진행자 하하(본명:하동훈·24)와 MC몽(본명 신동현·24)은 각각 대진대 연극영화과와 동아방송대 방송연예학과에 재학 중인 전문 힙합 래퍼 가수. 얼마 전부터는 청소년 대상 프로그램인 MBC TV ‘논스톱’시리즈에도 출연하는 만능 엔터테이너다. 지난해 10월 SBS ‘하하·몽의 영스트리트’ 진행자로 발탁될 때만 해도 이들은 거의 무명에 가까웠다. 이 프로그램의 이윤경 PD는 음악 전문 케이블TV에 출연하던 이들을 눈여겨 보다 진행자로 낙점했고, 하하와 MC몽은 이 프로그램 덕분에 확실히 ‘떴다’.
“엽기적이고 도발적인 그들의 진행이 청소년들에게 어필할 것 같았어요.” (이 PD)
이 프로그램은 주 1, 2회 인터넷 화상중계를 실시한다. 방송작가가 생방송 현장을 디지털 캠코더에 담는 것이다. SBS 홈페이지(www.sbs.co.kr)에 접속하면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스튜디오 속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야간 자율학습 때문에 라디오를 듣지 못한 학생들에게도 인기다. DJ들이 들려주는 사연이나 음악만으로 스튜디오 상황을 떠올리던 ‘상상력의 시대’는 갔다.
이날 청취자들은 인터넷 화면에서 하하와 MC몽이 털모자와 선글래스를 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또 음악이 흐르면 마구 몸을 흔들거나 자유롭게 자리를 비우는 것도 지켜보면서 수시로 인터넷에 질문을 올렸다.
“하하 형님, 안경 벗으니 더 멋있네요.”
방송작가와 함께 동아일보 ‘위크엔드’ 사진기자가 스튜디오 안에 들어가 촬영하자 하하와 MC몽은 카메라를 향해 혓바닥을 내보이는 등 과장된 표정과 엽기적인 몸짓을 연출한다. 사진기자의 모습이 화상중계에 언뜻 등장하니 이에 대한 의견도 즉각 올라온다.
“신문기자 아저씨, 울 오빠들 예쁘게 찍어주세요.”
같은 방송사의 ‘최화정의 파워 타임’(낮 12시∼오후 2시)과 이현우의 ‘뮤직 라이브’(오후 2∼4시)도 가끔 화상 중계를 한다. 최화정은 지난달 방송 때 가슴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톱을 입고 카메라를 향해 한껏 ‘예쁜 척’을 하고, 이현우는 생방송 도중 걸려오는 자신의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며 진행하기도 했다.
음악이 전파를 탈 동안 진행자들이 무얼 하는지, 여의도 스튜디오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한강의 풍경이 어떨지 궁금하다면. 라디오를 ‘보면’ 된다. 라디오는 ‘아름다운 가상’ 대신 ‘소통’을 택했다.
○ 라디오와 ‘놀다’
이날 하하와 MC몽은 MC몽이 속한 힙합그룹 ‘피플 크루’의 ‘너에게’란 노래를 즉석에서 ‘노래방’ 공연했다. ‘노래방’은 청취자들이 인터넷을 통해 신청한 노래를 음반으로 틀지 않고 진행자들이 직접 스튜디오 안에서 불러주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는 ‘공포의 오디션’이란 코너도 있다.
청취자들이 동네 노래방에서 노래한 모습을 CD에 담아 인터넷상의 개인 블로그에 올린 뒤 다른 청취자들과 전문 심사단(가수 박진영, 유리상자 등)의 심사를 받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뽑힌 청취자는 방송 프로그램에 직접 출연한다. 깜찍한 사진을 함께 올린 청취자들의 개인 블로그를 보고 있으면 10, 20대 연예인의 홈페이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은 모두 ‘스타’를 꿈꾼다.
이 프로그램을 비롯한 많은 프로그램들이 문자 메시지 서비스도 실시한다. ‘이건 비밀인데’ ‘오늘 기분은’ 등의 주제를 진행자가 정해주면 방송을 듣던 청취자들이 곧바로 휴대전화 문자로 답변을 보내는 것이다.
그 옛날 DJ 책상 위를 가득 채우던 편지 봉투 사연은 요즘 하루 10통 내외로 줄어들었다. 대신 200여건이 인터넷 사연이다. 이것 역시 줄어들기는 마찬가지이다. 라디오를 듣거나 보면서 바로바로 인터넷에 올라오는 반응이 1000건 가까이 된다.
라디오 스튜디오 안에는 추억의 턴테이블이 없다. 이 프로그램의 음향 담당인 김진규 엔지니어는 말한다.
“1990년대 중후반을 거치면서 턴테이블이 사라졌다. 요즘 CD 재생기로 음악을 틀고 있지만 거의 모든 곡이 컴퓨터 파일로 저장돼 있기 때문에 이마저도 사라질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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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디오에서 ‘배우다’
수요일인 이날 고정 코너는 ‘구성애의 니들이 성을 알아’. 아우성센터 구성애 소장이 진행자들과 함께 청소년들의 성(性)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구씨는 각종 피임약과 콘돔을 가지고 나와 사용법을 설명했다. TV 교양 프로그램과 다르지 않다.
“만약 여자친구가 콘돔을 갖고 다니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구성애)
“솔직히 많이 놀았구나, ‘꾼’이구나, 그렇게 안 좋게 보이죠.”(하하)
이 PD는 스튜디오 밖 컴퓨터 모니터에 부지런히 입력한다. ‘방송 수위 조절. 교육 차원이어야 함. 재미나 단순 호기심 추구하면 안 됨.’ 이 내용은 스튜디오 속 진행자들에게 실시간으로 전달된다.
10대 청취자들이 인터넷을 통해 보내온 질문은 다음과 같다.
‘딸기 우유 마시면 가슴이 커진다는데 맞나요?’
‘전 여자예요. 초등학교 5학년부터 자위를 했는데, 자위를 끊는 방법을 알고 싶어요.’
건축가 르 코르뷔제는 “건물이 밤에 가장 멋지게 느껴진다”고 했지만 미디어학자 마셜 맥루한은 “말은 어둠 속에서 그 건물보다도 더 풍요로워진다”고 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말’만 전하던 라디오는 이제 없다. 각종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융합하며 감각적이고, 유희적이고, 교육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미디어가 인간 오감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확장된다는 맥루한씨의 ‘예언’이 우회적으로 실현되고 있다.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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