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7년째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사하로프에게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 2명이 찾아왔다. 이들은 사람을 시켜 전화를 설치한 다음 입을 뗐다. “내일 모처에서 전화가 올 것이오.”
다음날 전화를 걸어온 것은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공산당서기장이었다. 그는 사하로프에게 석방 사실을 직접 알려주었다.
‘소련 수소폭탄의 아버지’ 사하로프와 고르비. 1975년과 1990년 각각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두 사람의 인연은 흥미롭다.
사하로프는 처음엔 고르비를 지지했다. 그의 지지는 “사면된 노예가 그의 주인을 도와주고 있다”는 냉소를 받기도 했다.
1989년 사망하기 전까지 1년 남짓 인민대표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했던 사하로프는 결국 고르비에 대한 지지를 접게 된다. 그는 보다 과감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며 고르비의 우유부단한 정책을 비판했다.
그는 고르비가 좀 더 일찍 공산주의를 포기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안타까워했다.
사하로프는 여러모로 솔제니친과 비교된다.
서방세계에서도 썩 환영받지 못했던 솔제니친. 조국을 등진 그는 러시아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반면 사하로프는 최근 러시아의 여론조사에서 레닌과 스탈린에 이어 세 번째로 ‘20세기 러시아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사하로프는 과학자였으나 그의 정치적 혜안은 놀랄 만큼 오늘의 현실에 맞아떨어지고 있다. 그의 주장대로 헌법에서 공산당 일당독재 조항은 삭제됐으며, 소연방은 해체됐고, KGB는 개편됐다.
사하로프는 “도덕적인 결정이야말로 현대 세계에서 가장 실용적인 정치적 선택”이라고 말해왔다. 그가 핵실험에 반대하고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비난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1994년 러시아가 체첸을 짓밟았을 때 사하로프의 이 발언을 상기시킨 것은 미국의 언론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이 스스로에게 물어야할 때다.
사하로프가 살아있다면 부시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 뭐라고 할 것인가.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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