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일본 도쿄(東京)에는 테마파크 순례를 겸해 데이트 약속을 잡는 커플이 많다.
도심과 외곽을 막론하고 재개발이 활기를 띠면서 막대한 비용을 들여 새롭게 단장한 테마파크가 앞 다퉈 문을 열고 있다. 테마파크의 개장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TV의 생활정보 프로그램이 가장 먼저 찾아가 시청자들에게 ‘알뜰 이용법’을 열심히 소개한다.
하지만 테마파크라고 해서 청룡열차나 바이킹을 탈 때와 같은 짜릿한 전율을 기대하고 가면 헛걸음하기 십상. 도쿄의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테마파크는 ‘놀이공원식’ 테마파크가 아니라 ‘요리를 주제(테마)로 한 공간(파크)’이기 때문이다.
특정 음식메뉴를 주제로 정해 놓고 매장 전체를 일정한 콘셉트에 따라 짜임새 있게 배치해놓은 공간이 최근 유행하는 일본식 테마파크인 셈이다.
‘식당가(食堂街)’라고 불러도 되는 곳에 굳이 테마파크라는 명칭을 쓰는 이유는 뭘까. 일본 요식업계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손님을 끌 수 없다고 항변한다. 기획사측은 “아무리 맛이 좋아도 단순히 식당을 배열하는 것만으로는 부가가치를 높일 수 없다. 무언가 색다르다는 느낌을 줘야 살아 남는다”고 설명한다.
라면 테마파크, 케이크 테마파크, 카레 테마파크, 만두 테마파크, 스시(생선초밥) 테마파크…. 음식의 가짓수만큼이나 종류도 다양하다.
○ 스위츠 포레스트
도쿄의 고급주택가 지유가오카(自由が丘)는 맛과 멋에 민감한 20대 여성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어서 제과점들의 생존 경쟁이 치열하다. 소비자들의 입맛이 워낙 까다로운 탓에 어설픈 솜씨만 믿고 점포를 냈다가는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퇴출당한다.
이곳에 케이크-초콜릿-아이스크림의 테마파크를 표방한 ‘스위츠 포레스트(Sweets Forest)’가 지난 달 21일 오픈했다.
지유가오카 전철역에서 5분 정도 걸으면 세련된 디자인이 눈길을 끄는 3층짜리 건물이 나온다. 1층이 백화점 식품매장이고 테마파크는 2층. 문을 열면 갓 구운 빵의 향긋한 냄새가 진동하고 방문객은 동화 속의 숲에 들어선 듯한 느낌에 빠진다.
빨강 노랑 분홍 꽃으로 장식된 나무(물론 인조)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새 소리와 시냇물 소리가 귀를 즐겁게 한다. 숲길 양쪽에 설치된 매장 안에서는 요리사가 직접 케이크나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시범을 보인다. 진열대에는 요리사의 사진과 경력이 내걸려 있다.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의 제빵 학원에 유학을 했다거나, 각종 국제대회에서 우승했다는 등의 ‘화려한 경력’이 소개돼 있다.
스위츠 포레스트는 숲을 거닐다가 마음에 드는 케이크나 아이스크림이 보이면 값을 치른 뒤 숲 속 곳곳에 있는 벤치에서 즐기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케이크 한 조각에 400∼500엔(약 4000∼5000원)이고 아이스크림 콘은 350엔을 줘야 맛볼 수 있다. 다소 비싼 가격이지만 고객들은 주저하지 않는다. 예술가의 작품이라도 되는 양 스푼을 뜨기 전에 요모조모 뜯어보고, 입에 넣은 뒤에는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음미한다.
○ 카레…라면…아이스크림…
음식 테마파크의 원조는 1991년 요코하마(橫濱)에 문을 연 ‘요코하마 카레 박물관’. 카레에 관한 모든 것을 한 자리에 모은다는 콘셉트로, 전국 각지에서 맛으로 명성을 날린 13곳의 카레전문점을 유치했다. 항구도시라는 특성에 맞춰 매장 내부는 개항 직후인 20세기 초의 항구 풍경으로 꾸몄다.
카레박물관이 매년 168만명이 찾는 명소로 자리잡자 1994년엔 인근에 ‘신요코하마 라면 박물관’이 들어섰다. 이곳도 “전국 각지의 라면을 싼값에 맛볼 수 있다”는 입소문이 번지면서 작년 말까지 입장객이 1200만명을 넘는 등 대성공을 거뒀다.
요코하마의 성공 신화에 고무된 전국 각지의 식당 주인들은 불황 극복의 전략으로 테마파크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홋카이도(北海道)의 ‘라면촌’(1996년)에 이어 후쿠오카(福岡)의 ‘라면 스타디움’(2001년), 오사카(大阪)의 ‘누들 시티’(2003년)가 등장했다.
올 7월 도쿄 동북부의 번화가인 이케부쿠로(池袋)에 문을 연 테마파크 ‘아이스크림 시티’에는 300여종에 이르는 메뉴 목록에 한국식 팥빙수가 당당하게 이름을 올렸다. 이런 추세라면 우리의 비빔밥이 테마파크에 등장할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일본 직장인들이 햄버거나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적당히 때운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본의 젊은이 중에는 “한 끼를 먹더라도 제대로 된 분위기에서, 제값을 치르고 먹겠다”는 미식가도 의외로 많다.
이제 일본의 어느 지방을 가도 요리를 주제로 한 테마파크에 들를 수 있다. 맛만 고집해서는 식당의 생존마저 힘들어진 불황 탓인지, ‘음식은 예술’이라는 신념이 투철한 식도락가가 늘어난 탓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박원재 특파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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