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탁(反託) 열기는 그전부터 이미 뜨거웠다=12월 26일 이승만 박사는 방송연설을 통해 “최후의 1인까지 죽엄으로 싸와 독립방해를 각성케 하자”고 호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화성돈(華盛頓·워싱턴)에서 오는 통신에 의하면 아직도 조선신탁통치안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우리 조선은 이 안을 거부하고 완전독립 이외에는 아무 것도 용인할 수 없음을 알리고 싶습니다. 여기에는 당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즉 투루만 대통령, 판스 국무장관, 연합군사령관 맥아더 대장, 하지 중장 등은 다 조선독립을 찬동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결심을 무시하고 신탁관리를 강요하는 정부가 있다면 우리 삼천만 민족은 차라리 나라를 위하야 싸우다 죽을지언정 이를 용납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반탁은 국민적 공론이었다=자주독립에 대한 국민의 열망이 뜨거웠던 그 시절 반탁엔 좌·우익이 있을 수 없었다. 찬탁을 운위하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당시 언론보도가 이 같은 여론에 충실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선일보는 12월 27일 사설을 통해 “신탁보다 차라리 우리에게 사(死)를 주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아일보는 12월 25일 사설에서 미국 뉴욕 타임스의 논지를 소개하면서 ‘(뉴욕 타임스는) 조선의 역사와 전통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증명한다 하엿고 따라서 조선사람은 적어도 민족자결의 기회를 가져서 당연하다고 하엿다’고 전했다. 소련은 신탁통치를,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한다는 내용의 동아일보 12월 27일자 1면 머리기사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보도됐다.
▽법통(法統)인 임시정부가 반탁을 주도했다=우리 헌법 전문은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기하고 있다. 모스크바 3상회의가 진행 중이던 12월 19일 범국민적인 임시정부 개선 환영식에서 김구 주석은 “우리의 독립주권을 창조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긴급하고 중대한 임무다”라고 역설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반탁의 중심은 임시정부였다. 임시정부는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결성을 주도했고, 이 위원회가 총파업과 시가행진 등 대대적인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동아일보도 12일 28일 사설에서 ‘신탁통치는 민족적 모독’이라고 규정하고 전국적인 반탁운동을 촉구했다. 그 다음날 사설에서는 ‘차라리 옥쇄(玉碎)하자’고 부르짖기도 했다.
▽문제는 좌익의 태도 돌변 때문에 생겼다=3상회의 직후엔 반탁 대열에 동참해 좌우합작에 의한 거족적(擧族的) 궐기를 공언했던 좌익이 불과 닷새 뒤인 1946년 1월 2일 돌연 찬탁으로 태도를 바꿨다. 조선공산당이 성명을 발표하고 ‘모스크바 결정은 카이로 결정을 더 구체화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좌익은 1월 3일 ‘3상회의 결정 절대지지’ 구호를 외치면서 가두시위까지 벌였다. 이것이 광복 공간에서 좌우 대결이 격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1월 7일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 선생이 유림을 대표해 동아일보에 발표한 ‘조선공산당에게 보내는 경고문’이 당시의 국민적 분노를 잘 보여 준다. 심산은 경고문에서 “(조선공산당의) 성명서를 읽고 나는 방성통곡하였다”며 “이러한 매국적 행동을 감위(敢爲)함은 이야말로 참된 민족반역자라 아니할 수 없다”고 준열히 성토했다.
▽박헌영은 닷새 동안 평양에 갔다 왔다=중앙일보사에서 펴낸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좌익의 태도 표변에 소련의 입김이 작용한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공산당 비서 박헌영은 1945년 12월 28일 38도선을 넘어 평양으로 향했고, 12월 31일 평양에서 로마넨코로부터 3상회의의 전말을 들었다. 이날 열린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집행위 상무위원회에서 3상회의 결정 지지 방침이 결정되었다고 한다. 박헌영은 1946년 1월 2일 서울로 귀환했다.”
박헌영은 그 뒤 찬탁 주장에서 몇 걸음 더 나아가 “조선의 소(蘇)연방 편입을 희망한다”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KBS 보도, 무엇이 문제인가=KBS1 ‘미디어포커스’는 13일 “동아일보 기사(1945년 12월 27일자 1면 머리기사)는 당장 독립을 원했던 한국 국민들을 자극해 격렬한 반탁운동을 일으켰고, 그 반탁운동은 결국 남북분단으로 이어지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그때 반탁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인가. 또 민족적 관심이 온통 3상회의에 쏠려 있을 때, 그와 관련된 외신을 어떻게 보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KBS의 주장은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당시 국민적 정서나 시대적 대의를 외면한 폭론(暴論)이다. 반탁운동과 남북분단을 곧바로 연결시킨 것도 당시 미소냉전을 비롯한 복잡한 국제정세를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논리전개다. 성균관대 김일영(金一榮·정외과) 교수는 “좌익도 처음엔 반탁을 했는데 동아일보 보도가 반탁운동을 일으켰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라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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