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걱정이 없고 슬픔도 없고
눈물 같은 것은 단 한 방울도 없는 곳.
내가 먹고 입을 것들이 조금쯤은
모자랄 만큼만 있는 그런 곳.
미움도 전혀 없고 싸움도 없는 곳.
높은 산 밑 깊은 물가에 맨살로 살지라도.
이별은 아예 없고 언제나 반가운
만남만 있는 곳.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손꼽아 나를 기다리는 가슴 따뜻한
사람들만 있는 곳.
내가 죽어 그곳에 하얗게 흩어져도
다시 가고 싶은 그런 곳.
-시집 '물고기 한마리'(문학동네)중에서
계미년 한 해가 저물어 간다. 365일 전, 희망찬 일출을 바라보며 저마다 ‘가고 싶은 곳’을 향해 열심히 달려왔다. 그러나 아직 ‘그곳’까지 얼마나 더 달려야 하는지 이정표조차 보이지 않는다.
시인이 ‘저곳’을 이야기할수록 ‘이곳’이 선명해진다. 사랑을 이야기할수록 미움이, 기쁨을 이야기할수록 슬픔이, 평화를 이야기할수록 싸움이, 만남을 이야기할수록 이별이 떠오른다. 전쟁과 질병과 가난과 슬픔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고 싶은 곳’이 실은 ‘갈 수 없는 곳’의 다른 이름이 아니던가. 유토피아(utopia)란 ‘없는 장소’라는 뜻이다. 이상향이란 도달하는 순간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도달할 수 없는 곳’이라 해서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아니, ‘없는 그곳’을 폐기해 버리는 순간 ‘있는 이곳’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가장 아픈 자가 가장 간절히 기도하듯, 삶이 절박할수록 꿈은 빛나는 것이다.
상처 없는 영혼과 상처 없는 정강이가 어디 있으랴. 바람아, 불어라. 눈보라야, 오너라. 무릎 걷고 맨발로 겨울 강을 건너자.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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