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理想主義 외교…1918년 윌슨 ‘14개조’ 공표

  • 입력 2004년 1월 7일 18시 42분


“국민의 신뢰를 받은 이상 그 어떤 힘도 대통령에게 맞서지 못하게 할 것이다.”

미국의 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 그는 볼셰비키 혁명을 이끈 레닌과 함께 20세기 현대사의 첫 장을 써나간 지도자였으나 그의 임기 말은 반대파와의 정쟁(政爭)으로 소진되었다.

1919년 파리평화회의로 떠나는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윌슨은 협상대표단에 상원 외교위원이나 야당인 공화당 의원을 단 1명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직전에 치러진 선거에서 공화당은 상원을 장악했고 외교위는 정적(政敵)들의 수중에 떨어졌던 것이다. 그들은 윌슨이 주창해 온 국제연맹 창설에 반대했다.

그러나 외교관례를 무시한 이 같은 독단(獨斷)은 결국 국제연맹 가입안이 상원에서 부결되는 화를 자초하게 된다.

프린스턴대 교수와 총장을 역임했던 최고의 지성인 윌슨.

그는 개혁 대통령이었다. 그의 ‘신(新)자유주의’ 혁신정책은 대자본에 반대하는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미국의 자동차가 사회주의적 감정과 부(富)의 오만함을 부추긴다”고 개탄했는데 그것은 도덕정치의 지침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고답적이고 융통성이 없는 이상주의자였다. 자기 과신과 오만함은 정치적 입지를 좁혔다. 고귀한 이상은 정치 현실을 타파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었고 국제정책은 파산의 길로 달려갔다.

베르사유 조약에서 그 허약한 실체를 드러낸 ‘14개조 평화원칙’이 단적인 예다.

세계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그의 위대한 구상은 점차 빛이 바랬다. 결국 “오렌지(독일)를 씨가 나오도록 짜겠다”고 벼르던 영국과 프랑스의 뜻대로 되고 말았다.

영국은 아프리카 내 독일의 식민지를 차지했고 프랑스는 알자스로렌 지방을 돌려받았다. 독일에 부과된 배상금은 너무 가혹했다. 약소국들이 환호했던 민족자결주의 원칙도 패전국이 지배하였던 지역에 국한됐다.

독일인들은 조약을 ‘명령’으로 받아들이며 굴욕감을 달래야 했고 나치스는 이를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윌슨의 해법’은 이미 제2차 세계대전의 불씨를 잉태하고 있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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