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산책]'말죽거리…' '브루스 리 세대'에 바친다

  • 입력 2004년 1월 8일 16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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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서울 말죽거리. 내성적인 현수(권상우)가 정문고로 전학을 온다. 현수는 선생들의 폭력과 학생들간의 세력다툼에 시달리다가 학교를 주름잡는 ‘주먹’인 우식(이정진)과 친해진다. 현수는 하굣길 버스에서 은주(한가인)를 보고 한눈에 반하지만, 은주는 거칠고 남자다운 우식에게 빠져든다. 우식과 신경전을 벌이던 선도부장 종훈은 비겁한 방법으로 우식을 꺾는다. 결국 우식은 학교를 떠난다. 종훈의 괴롭힘에 분노가 치민 현수는 리샤오룽(李小龍·브루스 리)의 무술을 밤낮으로 연마한다. 어느 날 현수는 쌍절곤을 품은 채 종훈에게 학교옥상에서의 한판 대결을 신청한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는 제목이 슬프다. ‘말죽거리’란 지명은 그 걸쭉하고 소박한 이미지를 스스로 배신하고 ‘잔혹하게’ 거세되기 때문이다. ‘말죽거리’에는 1970년대 유신 말기, 시대의 폭력성에 짓밟힌 청춘들의 상처가 숨어 있다. 싸움에 진 후 다시는 학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우식처럼, ‘말죽거리’란 지명도 잔인한 시대 속에서 어느 순간 증발해 버리고 ‘강남’이란 시대불문의 이름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유하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섬뜩할 정도로 창조적이거나 장르 파괴적이진 않다.

로맨스와 복고적 코드, 잔혹하지만 현실적인 액션을 아주 영리하게 배합한 ‘웰 메이드’ 필름에 가깝다. 유 감독은 전작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에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를 번갈아 들이대며 개인의 사적 영역과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자유자재로 오간다.

‘말죽거리’가 그 이름의 이미지를 배신했듯, 배우 권상우도 자신의 이미지를 스스로 배신했다. ‘말죽거리 잔혹사’ 어디에서도 우리는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나 드라마 ‘천국의 계단’ 등을 통해 권상우가 보여준 발견하기 어렵다. 그는 부잣집 아들의 바람기 철철 흐르는 눈빛을 버리고 수줍음과 열패감에 싸인 현수의 캐릭터에 자신을 투사했다. 권상우에게 비현실적이지만 영웅적인 싸움 장면 대신 지저분하지만 현실적인 액션을 주문한 유 감독의 선택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정진은 전작 ‘해적, 디스코왕 되다’와 거의 같은 캐릭터이면서도 아주 다른 연기를 해냈다. 그는 ‘젠체하는’ 태도를 버리고 캐릭터에 전념했다. 이정진은 교복을 입을 때 더욱 빛나는 것 같다.

올리비아 허시, 라디오 DJ 서금옥, ‘수학의 정석’ 등 1978년을 장악했던 청춘의 아이콘들을 발견하는 것도 색다른 재미를 준다. 아이콘들의 중심에는 리샤오룽이 있다. 청춘들은 이소룡에 자신을 투사하면서 시대의 폭압에 맞서려 했고, 이소룡을 통해 욕구불만을 배설했다. 오직 싸움의 승리를 위해 개발된 리샤오룽의 ‘절권도’는 대학에 가지 못하면 ‘잉여인간’으로 치부되는 부조리한 학교 현실을 깨부수는 심리적 필살기였다.

이 영화에는 조연이 없다. 주연 같은 조연만 있다. 도색잡지를 팔아 학비를 대는 ‘햄버거’, 1년 유급돼 ‘짤짤이’에만 정신이 팔린 ‘찍새’, 학교측의 지원을 등에 업고 횡포를 일삼는 선도부장 등 각양각색의 캐릭터들은 모두 꿈틀거리며 살아 있다. 그들은 그러한 유(類)의 인간들을 대변하는 정형성을 가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인 것처럼 보인다. 캐릭터의 힘이다. 16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이승재기자 sjda@donga.com

'말죽거리 잔혹사'에 나오는 1978년의 청춘 아이콘
대상(아이콘)의미
수학의 정석대표적 수학 참고서. 책 가운데를 파내고 담배를 숨기기도 했다
펜트하우스와 마성기남학생들이 내밀하게 돌려보던 도색잡지 및 만화
올리비아 허시영화 ‘로미오와 줄리엣’(1968)의 주연 여배우. 청초한 여성의 대명사
마세(일명 맛세이)당구대를 내리찍듯 치는 타법의 프랑스어. 지휘봉으로 머리를 때리는 체벌
Be to 부정사‘예정, 의무, 가능 등의 to 부정사’란 뜻으로 ‘예의가 비뚜루’라고 외게 했다
고고장디스코텍
남철·남성남2인조 코미디언 커플. 학생들은 고고장에서 이들의 춤을 흉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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