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귀향’=“친척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우리 가족의 살기 어려운 얘기가 나오는 게 싫습니다. 식구들 생각도 해야죠. 혼자 가서 참고 있다가 오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반도체부품 제조 공장에서 일하는 박모씨(43)는 매년 가족과 함께 고향에서 명절을 보냈지만 이번 설에는 혼자 다녀오기로 했다. 실적이 좋지 않은 회사가 석 달째 임금을 주지 않아 네 식구가 버스 타고 고향에 갈 경제적 여유조차 없기 때문.
그러나 돈보다 더 큰 이유는 식구들의 자존심.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학원 한 곳 제대로 못 다니는 두 자녀와 아내(41)가 자존심 상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경기침체가 장기화되고 임금체불과 실직이 급증하면서 박씨처럼 설을 맞아 혼자만 고향에 잠깐 내려갔다 돌아오려는 ‘나 홀로 귀향족’이 크게 늘고 있다.
전국고속버스운송사업조합에 따르면 올해 설 연휴 기간에 고속버스의 경우 좌석 하나만 예약한 경우는 전체의 약 26%로 15%선이던 지난해에 비해 10%포인트 이상 증가했다.
이 같은 현상은 경기침체의 영향을 많이 받는 제조업 근로자나 영세 자영업자들에게서 특히 두드러진다.
17일 오후 인천 남동구 남동공단에서 만난 인쇄부품 제조공장 근로자 최모씨(36)는 이번 설에 자신은 공장에서 일한다고 속이고 아내만 이틀간 고향에 보내기로 했다. 부모님 선물은커녕 조카들 세뱃돈을 줄 여유도 없어 고향에 내려갈 경우 체면만 깎일 게 뻔하기 때문.
최씨는 “주변 동료들 중 혼자서 고향에 가거나 아니면 아예 귀향을 포기한 경우가 다섯 명 중 한 명꼴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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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증후군 이렇게…”=“며느리가 먼저 마음을 바꾸면 ‘명절증후군’도 말끔히 사라져요.”
결혼 10년차 주부인 차혜숙(車慧淑·37·대전 유성구 어은동)씨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외아들에게만 의지해 살아온 시어머니(70)와 한때 심한 갈등을 겪었다.
자신 역시 시어머니와 같은 종류의 집착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자각이 없었다면 지금쯤 남편과 결별했을지도 모른다. 남편이 아들은 물론 시아버지 자리도 채워줘야 하지 않겠느냐며 오히려 모자(母子)만의 시간을 자주 마련해 줬더니 어느 샌가 시어머니가 자신의 곁에 와있었다.
주부 박윤미(朴允美·37·한의사·대전 중구보건소 근무)씨는 결혼한 지 4년 만인 1997년 한의대에 다시 입학하면서 시댁과의 불화가 시작됐다.
스스럼없던 시누이는 불만을 쏟아냈고 명절 때면 큰소리가 터져 나와 복통 두통 등 명절증후군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내가 시누이였다면 어땠을까’하고 생각해 보니 ‘핀잔’이 ‘배려’로 들렸다.
차씨와 박씨가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된 것은 대전 대덕연구단지 연구원과 그 가족들의 봉사활동 모임인 ‘일체회’에 가입하면서부터. 1993년 발족한 이 모임에서는 30, 40대 주부 30여명이 봉사활동과 함께 매월 한 두차례 모여 고부갈등 등 가정사에 대해 토론하고 성공 및 실패 사례를 공유해 왔다.
이들이 10년 동안의 ‘답안 찾기’ 끝에 도달한 결론은 ‘나부터 바꾸기’ ‘상대방 인정하기’ ‘감사의 마음 갖기’ ‘역할 바꿔보기’ 등이었다.
차씨는 최근 며느리 20여명의 생생한 성공담 30여개를 수록한 ‘며느리 도통하기(일체정신문화사·210쪽)’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
대전=지명훈기자 mhj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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