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소설가 송우혜씨 "이순신, 졸장부로 폄훼말라"

  • 입력 2004년 1월 19일 18시 37분


《“원균은 용맹하고 이순신은 소심하다는 설정에 맞추어 이순신을 너무도 비루하게 만들었다.”(송우혜)

“이순신을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원균도 명장이었다는 점을 주장하고 싶었다.”(김탁환)

김탁환 한남대 교수(문예창작과·36)가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쓴 소설 ‘불멸’(전 4권·1996)에서 역사를 왜곡했다며 소설가 송우혜씨(57)가 비판하고 나섰다. 송씨가 이미 절판된 김 교수의 소설을 문제 삼는 이유는 KBS 1TV가 7월부터 100부작으로 방송할 예정인 대하드라마 ‘이순신’이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와 함께 김 교수의 소설을 공동원작으로 하고 있기 때문.

송씨는 “방송 전에 왜곡을 바로잡고 싶다”며 ‘불멸’의 문제점을 지적한 글을 19일 본보에 보내왔다.》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은?=그동안 역사 교과서에서는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을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휘하 함대를 이끌고 경상도 바다로 건너가 싸운 임진년(1592년) 5월 7일의 ‘옥포해전’이라고 기록해 왔다.

그러나 김 교수는 왜적이 처음 바다를 건너온 4월 13일 자정 경상우수사 원균이 휘하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출동해 다음날 가덕도 앞바다에서 100척이 넘는 적선을 맞아 싸워 30여 척을 격침시켰다고 서술했다(불멸 1권 296∼308쪽 참조).

이에 대해 송씨는 “일본 침략군은 14일 부산을 치고 15일 동래를 함락시키느라 경상우수영 바다에는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이순신 ‘임진장초·壬辰狀草’의 ‘인왜경대변장·因倭警待變狀’ 참조).

▽남해현 창고 방화의 진실은?=임진년 4월 29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원균이 지휘하는 경상우수영 소속인 남해현의 곡식 창고와 무기 창고를 불태웠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이순신이 부하들과 짜고 남해현의 창고를 태운 뒤 왜군들의 방화로 위장했다고 묘사했다. 그 후 경상우수사 원균이 진상을 밝혀낸 뒤 이순신을 찾아가 “왜놈보다 더 비열하다”며 크게 혼을 내주는 것으로 묘사된다(‘불멸’ 2권 44∼122쪽 참조).

그러나 송씨는 당시 이순신이 원균의 요청으로 경상도를 구하러 가면서 ‘남해현은 사람들이 모두 도망가 성 안이 텅 비었고 곡식창고와 병기창고의 문도 모두 열려 있다’는 보고를 받고는 창고가 왜군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불살라 없애라고 명령했다고 주장했다. 송씨는 이순신이 이 사실을 ‘난중일기’에도 기록해 놓았고 임금에게도 그 전말을 상세히 기록해 보고했다고 밝혔다(‘임진장초’의 ‘근계위대변사·謹啓爲待變事’ 참조).

▽이순신의 정유년 부산 진격의 실상은?=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전쟁은 정유년(1597년)에 재개된다. 정유년 2월 이순신은 체포되고 7월 원균이 전사한다.

김 교수는 소설에서 정유재란이 일어난 뒤 이순신이 너무 두려워 부산 앞바다에 진격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체포됐다고 설정했다(‘불멸’ 4권 99쪽 참조). 잡혀간 이순신 대신 원균이 새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그러나 송씨가 선조실록에 실린 기록들을 날짜별로 정리한 바에 따르면 △2월 10일 이순신은 대형 전함 63척이 포함된 200여척의 대함대를 거느리고 부산으로 진격해 왜적과 싸웠고 △3월 20일 이순신 함대의 부산 공격을 헐뜯는 원균의 2월 28일자 보고가 궁중에 도착했다는 것.

송씨의 지적에 대해 김 교수는 “송우혜 선생이 인용한 사료들은 나도 모두 읽었다. 그러나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사료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차이”라고 반박했다.

김탁환 교수와 송우혜씨의 이순신 논쟁 내용
김탁환 교수 ‘불멸’의 내용논쟁점송우혜씨 반박
경상우수사 원균의 4월 14일 가덕도 해전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전라좌수사 이순신의 5월 7일 옥포 해전
이순신이 원균의 소속인 남해현의 창고를 불태운 뒤 왜군의 방화로 위장했으나 원균에 의해 들통남 남해현 창고 방화사건남해현의 창고들이 왜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이순신이 불태운 뒤 임금에게 보고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이 부산 진격을꺼려 체포된 후 후임인 원균이 용감하게부산으로 진격정유년 부산 진격이순신이 대함대를 이끌고 부산으로 진격해 왜적과 싸웠으며 이순신 체포의 원인은그의 군권(軍權)이 커지는 것을 선조가 견제하려 했기 때문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