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에 이르러 시험 삼아 그렸던 ‘춤’이라는 작품에서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93)은 이렇게 썼다.
작가는 눈만 뜨면 넘쳐나는 이미지에 휩싸여 사람들이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제 것 하나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다고 슬퍼한다. 그런데도 그의 그림은 속기(俗氣)가 없고 슬프지도 않다.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지는 선율로 한, 노인의 춤사위가 단아하고 유현(幽玄)하다. 월전은 많은 제자들에게 유난히도 ‘그림의 화격(畵格)’을 강조했다. 화격이란 전통의 수련을 거치되 얽매임 없고, 품성을 바탕으로 하되 절로 우러나오는 맑고 격조 높은 유현의 경지라 했다.
나는 덕수궁미술관에 전시된 월전의 근작들을 보면서 노경(老境)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한동안 작품들 앞을 떠날 수 없었다. 노경은 그저 노년이 아니라 젊음이었다. 무엇보다도 고귀하고 인자하고 단아한 작품에는 성정과 내면의 세계가 함축되어 흘러 넘쳤다. 점과 선과 여백 그리고 슬쩍 끊길 듯 말 듯 지나간 붓 자국도, 흐릿한 색채의 바림(번짐)도 절로 그렇게 나타나 보였다. 작품 모두가 정일하고 아름답다.
리커란(李可染·1907∼1989)은 전통 회화의 개혁을 실천한 중국이 자랑하는 화가다. 40세 이전에 세필 산수의 기초를 닦고 서양화를 배웠다.
내가 리커란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그의 스승인 판톈서우(潘天壽)의 그림과 함께 걸렸던 저장(浙江)미술학원에서였다. 리커란은 전통적인 수묵 중심 산수화를 벗어나서 이른바 ‘중국 전통회화의 개혁’과 ‘생활과 사생에서 출로를 찾으라’고 했던 정부의 지시를 받아들여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실경을 바탕으로 한 많은 풍경화를 남겼다.
그는 치바이스(齊白石)로부터 총애를 받았던 문인화풍의 문기(文氣) 어린 소박한 멋과 여운을 버리고 사실주의적인 화풍을 개척한다. 리커란은 “만약 내가 전통을 소홀히 했다는 평가를 듣는다면 심히 부끄러울 뿐”이라고 했다.
장우성과 리커란. 당대 두 거장이 펼쳐 보이고 있는 덕수궁미술관에서 선입관 없이 작품들을 둘러보면서 나는 문득 칸트의 말을 떠올렸다.
“위대한 어느 하나보다 누가 더 위대한지 모르는 둘이 있는 것이 더 좋지 않은가.”
윤명로 화가·서울대 명예교수
구독 204
구독 127
구독 8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