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서소문동 개인소장문고인 ‘아단문고’의 하영휘(河永輝) 학예연구실장은 올해 서강대 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한 유학자의 서간(書簡)을 통한 19세기 호서(湖西) 사회사 연구’에서 이 서간문들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하 실장은 “몰락한 명문 거족의 후손인 조병덕은 호가 숙재(肅齋)로, 죽을 때까지 고향에서 소학실이라는 서재를 마련해 주경야독했다”며 “그는 명분과 가혹한 현실 사이에서 ‘분열되는 자화상’에 고민을 거듭한 당대 지식인을 대변한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공개된 그의 편지에는 민란 등으로 어지러웠던 조선후기 사회를 배경으로 극심한 생활고와 흔들리는 계급사회, 가족제도에 고민하면서도 가장의 체면과 권위를 지키려는 한 인간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갑인년(甲寅年·1854년) 이후 양식이 떨어지고 돈도 없어 벼 가마니를 빌려 먹었다. 장차 살을 베어 배를 채워야 할 지경이다. 죽으면 죽었지, 동냥을 하겠느냐.”
그는 기본 생활비 외에도 체면유지에 필요한 제사, 장례, 혼인, 외출 등에 드는 지출이 더 벅차다고 호소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양반 가문을 지키려는 유학자로서의 도리에 대한 성찰과 고뇌가 가득하다.
“요즘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의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을 읽고 있는데 정밀하고 심오하고 깊은 의미가 퇴계와 율곡이 이르지 못한 것에까지 나아간 것이 많다. 유학을 숭상하면 백성과 나라가 오랜 혜택을 입지만 그 후 쇠퇴해 예의와 법도가 끊어졌다.”
둘째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고부(姑婦) 갈등에 대한 탄식도 담겨 있다. 이는 엄격했던 조선사회의 가계질서가 무너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네 형수는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할 수 없이 제 하는 대로 내버려둘 뿐이다.”
조병덕 부부는 결국 고부 갈등으로 인해 장남의 집을 떠났고, 심신이 허약한 그의 부인은 시름시름 앓다가 이내 세상을 하직했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