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정호승, '겨울 저녁'

  • 입력 2004년 1월 27일 18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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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엄마는 큰 가마솥에 깨를 볶으신다

아버지 송아지 판 돈 어디서 잃어버리고

몇 날 며칠 술 드신 이야기 또 하신다

한 번만 더 들으면 백 번도 더 듣는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에

부지깽이 끝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겨울 저녁

- 시집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열림원) 중에서

어째 이리 없는 것 천지인가? 선돌맹이 얼어죽는다는 대한(大寒)이 닥쳤건만 군불 땔 젖은 장작 한 뭇 없다. 쿵, 하고 삭은 고주박 부려다 놓을 부엌 바닥도 없다. 가랑잎이라도 그러넣을 아궁이도 없고, 군고구마, 국수 꼬랑지, 알밤, 도토리 슬슬 굴려 꺼내던 반 토막 부지깽이도 없다.

아버지 내다 판 송아지 워낭 소리도 없고, 송아지 살던 헛간도 없고, 진 데 넣어주던 마른 짚자리도 없고, 삶은 콩깍지 내음 구수하던 여물통도 없고, 나무주걱으로 슬슬 깨를 저어 볶던 팔순 노모도 이제 없다.

왜 이리 없는 것 천지인데 모두들 무사태평인가? 누구 하나 나뭇짐 하러 가자고 삽작께 와서 지게목발 두드리는 이 없고, ‘딩동댕’ 소리에 나가보니 가스 검침원이로구나. 이 달 장작 값, 아니 개스 값이 얼마래유?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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