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 TV 데뷔

  • 입력 2004년 1월 27일 18시 44분


“엘비스 이전엔 아무 것도 없었다.”(존 레넌)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 사람들이 록을 알게 된 것은 그를 통해서였다. 그에게서 록의 열정과 도발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1954년 그의 음악적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선 레코드사의 사장 샘 필립스. “누구처럼 노래할 수 있느냐”고 묻자 엘비스는 이렇게 답했다. “내 노래는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다.”

그는 록에 음악적 정체성을 부여했다. ‘엘비스 이후’ 록은 거리의 소음이라는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왔다.

방 두 칸의 판잣집에서 막노동꾼의 아들로 태어난 엘비스.

그의 열두 번째 생일 날 어머니가 선물한 기타는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트럭을 몰던 엘비스가 어머니의 생일선물로 취입한 노래 ‘마이 해피니스(My Happiness)’는 아메리칸 드림의 서곡(序曲)이 되었다.

전쟁을 모르고 자란 ‘베이비 붐’ 세대는 강하고 격렬한 비트에 매료됐다. 그의 독특한 스테이지 매너는 팬들을 사로잡았다. 그 유연한 허리의 율동과 엉덩이춤은 충격이자 도발이었다. 그는 통기타를 들고 야수처럼 무대를 누볐다. 여기에 폭풍처럼 몰아치다 솜사탕처럼 녹아드는 그 감미로운 보컬이라니.

사실 그의 로맨틱한 노래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당의정(糖衣錠)이기도 했다. 메릴린 먼로의 순진무구한 눈웃음이 그랬듯이, 미국의 패권주의는 지구촌의 절반을 자신의 독수리 날개 아래 두기 위해 대중문화의 상징을 필요로 했다.

비틀스가 미국에 상륙한 1960년대 중반부터 그의 시대는 저물기 시작했다. 영국의 ‘딱정벌레들’이 미 전역을 훑는 동안 그는 할리우드의 영화판을 기웃거렸다.

대중은 그를 숭배했으나 그는 고독했다. 부(富)와 명성도 내면의 공허를 어쩌지 못했다. 그 빈자리는 육체적 비만(肥滿)과 약물로 채워졌다. 잠을 자기 위해 수면제를 먹었다.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 각성제를 먹었다.

그가 죽었을 때 언론은 이렇게 썼다. ‘왕은 죽었다(The King Is Dead).’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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