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승협군(14·서울 노원구 하계동)은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 오후 11시면 TV 앞을 떠나지 않는다. 케이블 채널 OCN슈퍼액션의 ‘밴드 오브 브라더스(BOB)’ 때문이다. BOB는 2001년 미국 HBO 방송이 제작한 10부작 드라마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투입된 미국 공수부대의 실화를 다뤘다. 시청률은 1.3%대로 이 채널의 다른 프로그램 평균 시청률보다 3배가량 높다.
서울시립대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 안도열 교수(44)는 지난해 12월 말 ‘임페리얼 코리아’라는 전쟁소설을 출간했다. 21세기 중반의 한국 군부대가 과거로 돌아가 1894년 동학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출판사 ㈜자음과 모음은 지난해 7월 전쟁소설만을 묶은 ‘밀리터리북’ 시리즈를 국내 처음으로 선보였다. 출판사측은 전쟁소설의 고정 독자 수를 3만∼5만 명으로 보고 있다.
다음달 6일 개봉하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는 6·25전쟁을 배경으로 두 형제의 이야기를 담은 전쟁영화다. 순수 제작비만 147억원이 들었고 4차례 대규모 전투장면에 2500여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됐다.
왜 지금 ‘전쟁’인가.》
○ '이념'보다 '묘사'에 무게
그동안에도 전쟁과 관련한 드라마나 소설, 영화가 없던 것은 아니다. 6·25전쟁을 다룬 ‘광장’, ‘영웅시대’나 베트남전쟁을 배경으로 한 ‘무기의 그늘’, ‘머나먼 쏭바강’ 같은 소설이 있었고 TV에서는 ‘전우’, ‘3840유격대’ 그리고 ‘배달의 기수’가 있었다. 1960년대에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 ‘빨간 마후라’, ‘5인의 해병’ 같은 전쟁영화 붐이 일기도 했다.
이들 작품은 전쟁의 기억과 반공이라는 이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들이었다. 또 ‘태극기 휘날리며’에 군 관련 자문을 한 군사전문잡지 ‘플래툰’의 편집장 김세랑씨의 말대로 군이라는 이미지는 긍정적이지 않았다. 군사정권의 폭압적 이미지도 더해졌다. 1970년대 정책적으로 만든 반공영화 말고는 이렇다할 전쟁영화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기억과 이념에 목매는 시대는 지나갔다.
1995년에 나와 지금까지 100만부가 넘게 팔린 전쟁소설 ‘데프콘’의 작가 김경진씨는 “기존 전쟁을 다룬 소설들이 이념과 관련된 인간의 고뇌가 주제였다면 전쟁소설은 전투 묘사 자체에 상당히 기울어져 있다”고 말했다. 전쟁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씨도 “지금은 마음속에 상처를 갖고 전쟁을 보는 시대가 아니다. 지난해부터 여유 있게 과거를 돌아보는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쟁영화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말했다.
○ ‘미시적’ 스펙터클
76년 역사의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가장 많이 받은 영화의 소재는 전쟁이었다. 전쟁영화는 큰 스크린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스펙터클과 영웅, 전우애와 무용담이 있는 극적인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전쟁영화는 98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부터 물량공세뿐 아니라 전투장면의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역사적 실제에 가깝게 묘사하기 시작했다. 총알이 철모를 뚫고 파편이 살을 찢는 이 영화의 초반 노르망디 상륙작전 장면은 구경거리의 매력이 극대화됐다. 이 장면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전투장면을 재현하기도 하는 군사애호가들이 대거 참여했다고 한다.
한국의 전쟁소설은 90년대 초반부터 이런 군사애호가들을 중심으로 통신과 인터넷에서 생겨났다. 김경진씨는 “나 같은 독자가 진정 원한 것은 치열한 전투장면의 묘사였다. 그러나 그런 것을 다룬 전쟁 관련 소설은 거의 없었다”고 기억했다.
군사애호가들은 동호회 등을 통해서 각 국 군대의 편제 체계, 육해공군 무기 체계와 각 무기의 제원, 국지전 특수전 게릴라전 등 각종 전투 형태를 공부했다. 이들은 소설이나 영화의 전투장면에 등장하는 무기와 전차, 군복이 시대에 맞는 것인지, 구사한 전술이 현실에서 타당한 것인지에 더 큰 가치를 둔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평양시가지 전투를 위한 세트 제작에만 20억원을 쓰고 낙동강 방어전투 장면을 찍기 위해 2km에 이르는 진지를 실제 판 것도 이런 관객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다. 그런 면에서 실화를 바탕으로 1500억원의 제작비와 꼼꼼한 고증, 그리고 최신 CGI 기술을 사용해 전투장면을 만든 BOB의 인기는 당연한 것이다.
○ 현실 도피인가 정면 대응인가
지난해와 올해 초 미국 할리우드는 대규모 전투장면이 들어간 대형 영화 붐이 일었다. ‘마스터 앤드 코맨더’, ‘반지의 제왕 3편’, ‘매트릭스 3편’, ‘라스트 사무라이’, ‘콜드 마운틴’ 등이 대표적이다.
일부 언론은 “이라크전쟁을 겪는 국가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하지만 LA 타임스의 영화평론가 마놀라 다지스는 “결국 발 딛고 선 현실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최근 할리우드의 트렌드가 전쟁이라는 형태로 반영된 것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지적은 현재 한국의 전쟁소설에도 적용 가능하다.
전쟁소설은 안도열 교수의 작품처럼 가상 역사를 다룬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현재 무기체계의 발전과 국제정치적 역학 관계를 염두에 둔 가까운 미래의 가상전쟁에 관한 것이다. 한국이 미국 중국 일본, 그리고 북한과도 전쟁을 한다. 또 김경진씨의 지적처럼 대부분 강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하거나 극우 보수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한다.
자칫 한국이 처한 현실을 외면하고 “대한민국 만세”만을 외치는 대리만족용 작품으로 읽힐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태극기 휘날리며’나 ‘실미도’ 같은 영화는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는 측면이 있다. 실화나 실제 사건에 바탕을 둔, 있을 법한 이야기가 호소력 있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소설과 전쟁영화의 미래는 어떨까.
㈜자음과 모음의 최낙영 주간은 “전쟁소설이 하나의 장르로 인식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고 말했다. 김영진씨는 “전쟁영화는 제작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태극기 휘날리며’가 흥행에 성공한다고 해도 트렌드로 자리 잡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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