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인 나카니시 쇼지는 스무 살 때(현재 60세) 교통사고로 크게 다쳐서 휠체어 생활을 하고 있는 신체장애인이다. 그가 사고를 당했을 당시에는 신체장애인 대부분이 장애인용 시설에 보내졌다. 그러나 그런 시설에서는 규칙에 꽁꽁 묶인 생활을 해야 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장애인의 인격 그 자체가 무시됐다. 그래서 그는 결연히 시설을 나와 지역사회에서 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지역사회에서 일상생활을 하려면 당연히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때마다 장애인은 “죄송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를 연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복지 행정 또한 ‘불쌍한 장애인에게 베푸는 은혜’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저자는 “비굴해지는 것은 이제 그만두자. 동정 어린 복지는 받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어떻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동등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라는 진지하면서도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저자는 장애인인 ‘당사자’의 일은 모두 자신들이 결정한다는 ‘당사자 주권’의 사고방식을 탄생시켰다. 행정이 결코 복지의 주체가 아니고 의사가 치료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족조차도 장애인을 대변할 수는 없다는 것이 이 주장의 핵심이다. 복지, 치료, 생활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장애인 자신이라는 혁명적 생각이 탄생한 것이다.
이 같은 나카니시씨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장애인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생활할 수 없는데, 어떻게 장애인이 ‘자립’적 생활을 할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이런 의문에 대해서는, ‘자립’이 만일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살아간다’는 의미라면, 그런 생활을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는 저자의 대답이 준비돼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장애’란 신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 문제라고 말한다. 하반신이 불편해 휠체어를 사용해야 하는 사람이라도 모든 교통 기관에 엘리베이터가 있고 도로의 높낮이가 고르다면 휠체어를 타고 이동하는 데 전혀 ‘장애’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장애인이 ‘장애’로 느끼는 조건은 ‘비장애인’이 지배하는 사회가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나카니시씨는 지역 사회에서 생활하는 장애인이 24시간 필요한 만큼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자립 생활 센터’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 조직은 지금 전국 규모로 발전했고 정부의 복지 정책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힘을 갖고 있다.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 장애인만은 아니다. 고령자, 환자, 유아 등도 그렇다. 또 사회에서 늘 주변적 위치에 놓여 있는 사람들도 자립을 목표로 걸어 나가고 있다는 의미에서 장애인 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 마디로 당사자 주권이란 ‘타인이 자기를 대변’하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다. 따라서 대의민주주의나 전문가 지상주의에도 날카로운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게 된다. 지금 일본에서 가장 활발히 활약 중인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가 공저자라는 점 또한 이 책이 사회운동론으로서의 시야를 넓혀 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연숙 히토쓰바시대 교수·언어학 ys.lee@srv.cc.hit-u.ac.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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