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절 길거리에서 차력 시범이나 공연을 보여주며, 원료를 알수 없는 고약, 드링크 등을 팔았던 약장수. 인간 복제까지 가능하다는 첨단 의료시대에도 '만병통치약'이라며 제품 설명에 여념이 없는 '약장수'를 서울 한복판에서 만났다.
서울시 서대문구 한 주택가 골목. 이곳 입구에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커다란 간판이 걸려있다.
'만병통치약' '90세 이상은 무료'
그 아래에는 이미 자기 자신이 또 하나의 간판이 되어버린 백발의 늙은 사업가가 낡은 의자에 기대앉아 겨울 햇살을 쬐고 있다. 그 곁에는 주인만큼 오래된 커다란 라디오가 부러진 안테나로 힘겹게 전파를 붙잡고 있다.
42년째 같은 자리에서 약을 팔아온 이종주(72) 할아버지.
그의 다섯평 남짓한 허름한 가게 앞에는 출입구를 제외한 양쪽에 벽돌과 나무상자들이 약 1미터 높이로 쌓여 있다. 마치 방어용 진지 같은 느낌이 든다.
"벌써 도둑을 수차례 맞았어. 잘 정리해서 가격표 붙여 놓고 장사를 했더니 툭하면 도둑이 들어 원재료를 몽땅 털어갔어. 그래서 자동차로 들이받아도 끄떡없게 이렇게 방어선을 구축했지."
도난방지를 위한 할아버지의 작전은 가게 안쪽에도 펼쳐져 있다. 신문, 잡지, 종이박스가 발딛을 틈도 없이 널려있는 가게 안엔 값이 나갈만한 물건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이 쓰레기들 속에 비싼 약들을 꼭꼭 숨겨놨지, 이 가게 안에는 신분이 확실한 사람만 들어오게 하지. 기자들이니까 내가 보여주는 거야."
1차 방어선 벽돌 위에는 빈 드링크병들이 올려져 있고 곳곳에 직접 손으로 쓴 광고 문구들이 보는 이의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外國人 無錢 施食 奉事處(외국인 무전 시식 봉사처)'
"지난 월드컵때에는 경기장에 직접 약을 가지고 가서 외국인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기도 했지. 먹어본 관광객들이 피로가 없어지니까, 다시 찾더라고…"
다행히도 할아버지가 판매하는 약은 직접 조제한 불법약품이 아니다. 시중에서도 판매되는 H사의 홍삼관련 건강식품을 다양하게 구비해놓고 있는 할아버지는 자칭 홍삼 전문가.
"우리나라 홍삼은 전 세계 유명 박사들도 그 효과를 인정했어. 특히 소련(러시아)의 C.A. 메이오 박사는 만병통치약이라고 발표했지."
할아버지가 내미는 안내전단에는 일본, 미국, 영국, 불가리아 등의 유명하다는 연구자들의 이름과 효능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항당뇨, 항암, 심장강화, 간보호, 위장강화, 정력증진, 노화억제, 면역기능 강화'
안내문을 찬찬히 읽으며 설명을 들어보니 진짜 '만병통치약'이다.
K대학 법대 52학번으로 지방신문사 견습기자로 근무하기도 했다는 할아버지가 본격적인 '약장수'의 길로 들어선 것은 건강식품회사인 A사 사장으로 있던 손모씨와의 인연 때문.
육군 준장출신인 손씨의 비서관(4급 공무원)으로 수년간 함께 근무했던 할아버지는 손씨가 건강식품회사인 A사의 대표로 취임하자 이 회사의 제품을 공급받아 판매하기로 한 것.
당시 당뇨와 위장병으로 고생하던 할아버지 자신도 이 약을 먹고나서 깨끗하게 나았다고 한다. 지금도 밥을 거르는 적은 있어도 이 약만큼은 하루 세번 꼬박꼬박 먹는다.
"손사장 덕분에 약의 효능을 알게 되고, 사업을 시작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받았어. 결국에는 이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는 길을 택했지."
그는 요즘 후계자를 물색 중이다.
"이렇게 좋은 약효를 나 혼자만 알고 있기가 너무 아깝고, 이젠 나이도 들어서 괜찮은 사람이 나타나면 모두 물려주려고 하는데…"
할아버지에겐 1남 1녀의 자식이 있지만 모두 아버지의 길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아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사업을 벌였고 딸 역시 결혼한 뒤 분가를 했다. 10여년전엔 부인마저 세상을 떠나 홀로 사는 할아버지의 얼굴 한구석엔 떠나간 식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역력하다.
"보고싶지. 물론 보고싶은데, 요즘 사는 형편들이 다들 그렇잖아. 딸이야 명절에나 한번 만나는 거고, 아들도 자주 못오고….가끔씩 용돈만 보내주더라구. 다들 자기 살기가 바쁘니까 어쩔 수 없잖아."
효도관광이네, 어르신 잔치네 하면서 유명인을 앞세워 약효도 입증안된 건강보조식품으로 바가지를 씌우는 '꾼'들과 달리 무료 제공이 많아 늘 적자라는 약장수 할아버지.
효능에 대한 과장이 다소 섞이긴 했지만 품질이 인증된 제품을 어려운 이웃에게 무료로 나눠주고, 외국인들에게 한국 홍삼의 우수성까지 알리고 있는 그에게는 은근한 약초 향기가 배어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서는 기자에게 할아버지가 팔고 있던 홍삼함유 사탕을 몇개 집어주었다.
"흐흐흐, 회사에 가서 이걸 입안에 넣고 가만히 있어봐. 여직원들이 '이게 무슨 향기지'하면서 슬슬 옆에 다가와 붙어 앉을거야. 이게 아로마 효과라는 것이거든…"
최건일 동아닷컴기자 gaegoo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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