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기 위해 ‘회색적 상상력’을 당당하게 표방한 지식인들의 발언이 책으로 묶여 나왔다. 계간 ‘당대비평’이 ‘당비생각’이라는 제목의 단행본 시리즈 첫 권으로 내놓은 ‘우리 안의 이분법’은 보수와 진보, 친미와 반미 등으로 진영이 나뉘어 상대를 사갈시하는 상황을 비판한 9명의 학자, 전문가들의 글모음이다.
서론격의 첫 장을 쓴 윤평중 교수(한신대·철학)는 정치의 본질을 ‘적과 동지의 이분법’으로 규정했던 나치 어용학자 칼 슈미트 사상의 악마적 광휘가 ‘참여의 봄의 한국’을 뒤덮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대북인식에 관해 “서로를 수구냉전집단과 민족배반자라고 도식화시켜 딱지 붙이고 자신들만이 객관적 진리를 독점한 듯 강변한다”고 비판한다.
‘우리사회의 이분법’이 주목한 주제는 △친미와 반미 △친일과 반일 △체제수호적 통일과 반체제적 통일 △공익과 사익의 충돌 △중앙과 지방의 갈등 △성(性) 대결의 신화 등이다. 각 주제의 필자들은 편을 갈라 어느 한쪽을 지지하는 입장을 버리고, ‘흑과 백 양 극단 사이에 있는 실천적 진실’을 드러내는 데 주력했다.
친미-반미 문제를 다룬 권용립 교수(경성대·국제정치학)는 먼저 친미가 정치적 현실이라면 반미는 역사적 인식임에도 같은 차원에서 다뤄지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한국사에서 외교적 ‘친(親)’과 ‘반(反)’은 친명-반청, 친청-반일, 친일-반청, 친미-반공 등 항상 복수의 외세를 향해 동시에 존재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미국이라는 하나의 외세만을 두고 친과 반을 논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것.
친일-반일 문제를 다룬 윤해동 연구원(역사문제연구소)은 친일파 청산을 과거청산과 결부시키는 믿음은 정치를 도덕, 윤리와 결부시키는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부패한 정치보다 도덕적으로 정향된 정치가 더 위험할 수 있으며 정치와 도덕의 영역은 분리돼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
윤평중, 권용립, 윤해동 3인의 논의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성적 사유를 흑백 이분법의 그물 안에 포획하는 ‘우리 안의 괴물’이 민족주의에서 배태됐음을 지적한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촛불시위와 ‘붉은 악마’ 현상 뒤에 숨어있는 한국 민족주의의 팽배가 ‘자기 충족적 폐쇄회로’에 빠져있다고 지적하면서 민족담론의 지나친 감수성과 일방주의를 고발한다.
권 교수는 “개항 후 100여년간 외세를 ‘우리 안의 바깥’으로 두면서 생성된 외세 콤플렉스가 자존이 힘든 현실에 대한 자각과 맞물려 우리의 과거를 보상해 줄 역사적 피고로서 ‘바깥’을 지목하는 집단 습성을 키워냈다”고 비판한다.
윤 연구원은 “친일파 청산이 ‘민족’이라는 모호한 대상에 대한 귀속의식과 충성서약을 강요한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면 친일파 청산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밖에도 김창엽 교수(서울대 보건대학원)는 의약분쟁처럼 공익과 사익이 맞부딪칠 때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국가에 대한 불신’에, 박홍규 교수(영남대·법학)는 ‘서울과 지방’이라는 표현 자체에 숨은 서울중심주의에, 황정미 교수(한림대·사회학)는 성 대결의 이분법적 사고에 숨은 여성의 피해의식과 남성의 과민반응에 각각 천착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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