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서로 제대로 불러요]<1>‘남편’을 부를때

  • 입력 2004년 2월 19일 18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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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간의 적절한 호칭은 화목한 가정 생활을 뒷받침하는 버팀목이다. 부부가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가족 간의 적절한 호칭은 화목한 가정 생활을 뒷받침하는 버팀목이다. 부부가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호칭과 지칭이 붕괴하고 있다. 부부끼리 ‘오빠’ ‘아빠’라는 호칭이 난무하고 있으며 자녀 앞에서 남편을 ‘아빠’라고 부르는 여성도 있다. 반론도 있다. 호칭과 지칭을 제대로 쓰고 싶은데 몰라서 못 쓰는 경우도 적지 않다. 또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알고는 있으나 막상 실천이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바람직한 호칭과 지칭을 제시하는 기획 기사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최근 정부의 한 여성 고위직 인사는 지인들과 연주회에 갔다가 몸 둘 바를 모를 처지에 놓였다.

이 인사는 지인들에게 아들 내외를 소개하려고 했는데 며느리가 허겁지겁 뛰어와 “오빠가 늦어서…”라고 둘러댔다. 여기서 ‘오빠’란 물론 남편을 지칭하는 말.

요즘 이처럼 남편을 오빠로 부르는 여성이 적지 않다. 오빠까지는 아니더라도 남편을 아빠 또는 아저씨라고 부르는 여성도 있다.

경기 고양시 일산에 사는 주부 송모씨(30)는 한때 아파트단지에서 등글개첩(나이 어린 첩)으로 소문이 났다. 남편이 민머리여서 외형상 나이 차가 나 보이는데다 남편을 ‘아빠’로 호칭한 것이 엉뚱하게 소문난 것이다.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의 눈에도 가장 신기한 것이 원칙 없는 호칭이다. 호칭만 본다면 한국은 ‘근친상간의 사회’라고 혹평을 하기도 한다.

신세대 부부는 연애하면서 부르던 호칭이나 이름 등을 그대로 부르는 경우가 많지만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이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여보’, ‘당신’이라고 부르면 ‘닭살’이 돋는 느낌 때문에 기존의 호칭을 고수한다. 이들 역시 호칭 문제로 괴로운 것이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 20, 30대 주부의 20% 이상이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남편의 나이가 자신보다 어려도 오빠라고 부르는 여성이 상당수였다. 많은 전문가들이 우리 사회의 호칭 붕괴 수준이 위험한 단계에 들어섰다고 진단하고 있다. 특히 TV드라마의 호칭 파괴가 호칭 붕괴를 촉발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 옥선화 교수는 “외국에서는 호칭이 세분화되다가 어느 시점부터 서서히 단순화되는 과정을 거치는데 한국은 갑자기 호칭 시스템이 붕괴돼 뒤죽박죽된 것이 문제”라고 해석했다.

서울대 의대 정신과 유인균 교수는 탈권위 사회에서 신세대의 ‘피터팬 신드롬’이 겹쳐져 나타나는 현상으로 해석했다. 기존의 호칭을 싫어하는 데다 성인의 도덕률을 배우는 통과의례를 거부하기 때문이라는 것. 이는 협상 때 떼를 쓰고 티끌만 한 손해도 거부하는 우리 사회의 유아적 성격과도 관련이 있다는 설명이다.유 교수는 또 “정신이 건강한 사람은 어른 역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호칭을 아무렇게나 쓰는 사람에게는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을 개연성이 있다”고 말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호칭 문제는 원론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국예절문화원 남상민 원장은 “교양 있는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호칭 문제로 고민하지 않는다”면서 “어른들이 자녀에게 바람직한 언어교육을 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결혼 전후에 아들과 며느리 또는 딸과 사위를 앉혀 놓고 호칭 등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것.

일부 여성운동가들은 호칭 시스템의 붕괴를 남성 위주의 봉건적 가족시스템이 붕괴하는 과도기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한 여류시인은 “한국 남성은 누이에 대한 보호본능이 있다”며 오빠 호칭은 ‘누이 신드롬’의 일종이라고 이색적으로 진단했다.

H그룹 손모 과장(37)은 6년 연애 끝에 결혼해 부부간에 ‘오빠’, ‘○○야’라는 호칭을 좀체 못 버리다가 얼마 전 이를 악물고 ‘여보’, ‘당신’으로 바꿨다. 손 과장은 “아내가 애인에서 마누라로 비로소 바뀌었고 우리가 ‘한 가족’이라는 느낌이 들었다”면서 “토닥토닥 별 이유 없이 싸우는 일도 현격히 줄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호칭을 바꾸는 것에도 요령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남 원장은 “여보와 당신이 표준이라지만 ○○아버지, ○○엄마 등의 과도기를 거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옥 교수는 “한 가지 호칭을 고수하기보다는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른 호칭을 쓰는 것도 괜찮으며 부부가 어떤 호칭을 쓸지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둘만 있을 때에는 서로의 애칭을 부르는 것도 좋으며 자녀 앞에서는 ‘○○아버지, ○○엄마’라고 부르는 것이 교육적으로 좋다는 것.

반면 아무리 여보, 당신이 표준적 호칭이라지만 어른 앞에서 큰소리로 배우자를 부르는 것 역시 결례라는 지적이다.

이성주기자 stein33@donga.com

부부의 시기별 바람직한 호칭
시기아내→남편남편→아내
신혼여보, ○○씨, 여봐요여보, ○○씨, 여봐요
자녀가 생기면여보, ○○아버지(아빠)여보, ○○엄마(어머니)
장 노년기여보, 영감, ○○아버지, ○○할아버지여보, 임자, ○○어머니(엄마),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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