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노랫가락이나 오래된 사진첩이 그렇듯 ‘먹을거리’ 또한 추억을 길어 내기에 더없이 좋은 두레박이다. 보글보글… 소리와 함께 저절로 아득히 떠오르는 냄새며 혀끝의 감촉. 그 정겨운 기억은 이제 다시 되찾을 수 없는 시절의 정과 아픔, 만남과 이별을 되살려낸다.
소설가 시인 만화가 등 문화계 인사 13명이 ‘음식’을 두레박삼아 흘러가 버린 시간을 길어 올렸다. 때론 진한 가족애로, 때론 서글픔으로 다가오는 그 시절의 ‘내음’은 어느 쪽이든지 선뜻 버릴 수 없는, 보물과도 같은 기억이 된다.
소설가 박완서는 비 오는 날의 ‘메밀칼싹두기’를 떠올린다. 어린 시절 벽촌 비 오는 날의 적막감은, 인생의 원초적인 고독의 예감과도 같은 것이었다고 작가는 회상한다. “그런 날은 아마 나뿐 아니라 식구들이 제각기 다들 까닭 없이 위로받고 싶어지는 날이 아니었을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칼싹두기나 해 먹을까라는 소리가 나왔다.”
양념장을 곁들이지도, 고명을 얹지도 않은 메밀로 만든 굵은 칼국수. ‘무던하고 구수한 메밀의 순수 그 자체.’ 땀 흘려 한 그릇씩 메밀칼싹두기를 먹고 나면, ‘이렇게 화목한 집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는, 기쁨인지 감사인지 모를 충만감이 왔다’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요새도 같이 먹을 사람이 없으면 수제비를 뜨지 않는다. 내가 잊지 못하는 건 메밀의 맛보다 화해와 위안의 맛이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가 신경숙에게도 어린시절 음식이 주던 화해와 위안의 기억은 있다. 그에게 봄은 ‘큰방에 세워놓은 고구마꽝의 고구마가 바닥나는 계절’로 기억된다. “어쩌다 점심 때는 식구들이 다 모여 시원한 동치미 국물을 떠다 놓고 따끈따끈한 물고구마를 까먹는 것으로 점심을 대신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면 제법 우리 식구들이 단란해 보여 기분도 좋고 그랬다… 물고구마와 생무를 먹으며 겨울을 통과해 오면 자기도 모르게 쑥 커 버린 느낌이었다.”
자신을 유독 귀여워한 아주머니에게서 생전 처음 받아든 살살 녹는 바나나의 맛, 아주머니가 자신을 양자로 들이려 한다는 얘기에 발길을 끊었지만 지금도 못내 생각나는 인자한 얼굴(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아프리카에서 원주민들이 건네준, ‘원 내용물을 꺼내지 않은’ 고소한 곱창(장용규 한국외국어대 아프리카어과 교수)…. 저마다 눈길 가는 사연들 가운데서도, 종종 집에 양식이 떨어지곤 했다던 소설가 공선옥의 꿈 얘기는 유달리 가슴 저릿하다.
“나는 요즘도 이따금 논을 사는 꿈을 꾼다. 우리 것이 된 살푸쟁이(비옥한) 논에서 누런 나락이 파도처럼 넘실대는 꿈을 꾸고 난 아침이면 왜 그리도 가슴이 쓰라려 오는지….”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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