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삼성생명이 남녀 직원 325명을 대상으로 이상적인 아내에 대해 물었더니 59%가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슈퍼우먼형’이라고 대답했다. ‘현모양처형’은 18%에 불과했다.
슈퍼우먼의 남편들은 “마누라 덕에 아이들 학비 걱정 안 해요”, “내 아내가 이 정도”라고 자랑하지만 이들의 속내가 편한 것만은 아니다. 많은 남편이 슈퍼우먼 아내를 외조(外助)하면서 가정을 꾸려 가고 있지만, 잘난 아내 때문에 열등감에 짓눌리는 ‘작은 남편(small husbands)’ 역시 적지 않다.
정신과 의원이나 부부 관계 상담실, 이혼 전문 변호사 사무실 등에는 아내보다 못난 처지를 비관하는 작은 남편들의 하소연이 이어지고 있다.
이혼전문 김수진(金秀珍) 변호사는 “이혼 상담을 하는 20, 30대 5명 중 2명이 ‘잘난 배우자’에게 무시당하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한다”고 말했다.
특히 남편 쪽의 승진이 더디거나 남편의 월급이 아내보다 적은 경우 아내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는 남자가 많다는 것. 또 처음에는 슈퍼우먼 아내와 아무 일 없다가도 주위에서 무심코 던지는 말이 쌓여 부부싸움으로 비화되고 이혼을 결심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작은 남편도, 슈퍼우먼도 행복하게 살기가 녹록지 않은 것이다.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이모씨(35·여)는 최근 이혼했다. 이씨는 “월급이 남편보다 많아지자 남편은 술자리가 잦아지는 등 밖에서 맴돌았다”며 “그러다가 갑자기 트집을 잡고 화를 터뜨리는 일이 되풀이돼 도저히 함께 살 수 없었다”고 말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양창순(楊昌順) 대인관계연구소 소장은 ‘작은 남편’의 이런 행동을 “열등감이 간접적으로 공격성을 표출하는 ‘수동공격성’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진단했다.
질투와 경쟁심은 인간의 본능이고 부자간, 형제간에도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으며 부부간에도 예외가 아니라는 설명이다. 오히려 부부간에는 이런 감정이 깔려 있는 상태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으면 외도 폭음 비아냥 등 우회적인 방식으로 표출될 수 있다는 것.
양 소장은 “열등감은 무의식에 잠재되는 경우가 많고 이 경우 대수롭지 않은 말에도 상처를 받을 수 있다”며 “부부간에 어떤 말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지 평소 신경 써야 한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보편적으로 남성은 수직적 대인관계에 익숙하고 수평적 관계에 생소하기 때문에 부부관계와 같은 수평적인 환경에서 생기는 상처에 더 민감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남성이 여성을 이끌어야 한다는 가부장적 문화도 ‘작은 남편’의 마음을 아리게 하는 요인이다.
성균관대 의대 강북삼성병원 신경정신과 오강섭(吳綱燮) 교수는 “남편도 아내에게 질투감이나 열등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진정한 외조가 가능하다”며 “감추려고 하면 감정이 왜곡돼 쌓인다”고 설명했다. 양 소장은 “아무리 슈퍼우먼이라도 잘못하는 부분이 있으며 부부는 서로의 열등감을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부가 함께 있을 때 주위에서 “부인이 남편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것 같다”는 등 남편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말을 하면 이렇게 뚱기며 위기를 벗어나는 것은 어떨까.
“어머, 선생님은 부부싸움 조장하는 가정파괴범 같네요.”
이성주기자 stein33@donga.com
▼미국엔 '트로피 남편'▼
‘한국에는 셔터맨, 미국에는 트로피 남편.’
미국에서는 요즘 사회 경제적으로 성공한 아내를 대신해 ‘안사람’ 역할을 하는 ‘트로피 남편’이 주목받고 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무능해 집안에 들어앉은 세칭 ‘셔터맨’과 달리 아내가 밖에서 일하는 편이 더 뜻 깊다고 판단해 과감히 일을 던져 버리고 주부 역을 자임한 사람들이다.
‘트로피 남편’이란 미국의 경제지 포천이 만든 신조어. 실상 트로피 남편에 앞서 ‘트로피 아내’라는 단어가 먼저 등장했다. 이 단어는 1980년대 말 성공한 중장년 남성이 조강지처와 이혼한 뒤 젊고 아름다운 여성과 재혼하는 것을 두고 마치 성공의 보상으로 아내를 트로피처럼 받는다고 해 생겨났다. 이에 대비되는 의미로 최근 트로피 남편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진 것.
대표적 인물은 포천지가 6년 연속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경영인으로 선정한 HP사의 칼리 피오리나 회장의 남편 프랑크 피오리나.
그는 AT&T에서 함께 일하다 결혼했으며 아내가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영대학원 특별연구 과정에 입학하자 두 딸의 양육과 가사를 맡았다. 피오리나 회장이 루슨트사의 사장에 취임하자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집안일에만 전념하고 있다. 그의 명함에는 ‘칼리 피오리나의 외조자’라고 쓰여 있다.
또 필름 제조사인 브래디사의 최고 경영자 캐서린 허드슨의 남편 밥은 ‘CEO 10537…’이라고 쓰인 명함을 갖고 다닌다. 여기서 ‘10537…’은 집 주소.
포천지에 따르면 미국의 최고 여성사업가 50명 중 3분의 1에게 트로피 남편이 있다고 한다.
트로피 남편이 가능한 것은 가사와 육아가 소중한 일이라는 인식과 부부 중 한 명이라도 육아를 책임져야 아이가 제대로 큰다는 교육관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트로피 남편이 경제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노르웨이 총리와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을 역임한 그로 할렘 브룬틀란의 남편은 대학교수로 재직하다 부인이 정계에 진출할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살림과 아이들을 맡겠지만 내 방식대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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