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宗, 구한말 의병 활동 도왔다…의병모집 격문 원문 발견

  • 입력 2004년 2월 26일 19시 28분


‘원주 창의소 통문’의 원문을 발견한 김성근 경기 평택시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연구원. 김 연구원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우암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에서 이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김미옥기자
‘원주 창의소 통문’의 원문을 발견한 김성근 경기 평택시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연구원. 김 연구원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우암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에서 이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김미옥기자
구한말 항일의병 활동이 재야 유생(儒生)들만의 봉기가 아니라 고종 측근 관료의 적극적 개입으로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사료가 발견됐다.

김성근 경기 평택시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연구원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1895년 을미사변 직후 강원 원주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했던 격문 원문을 발견해 26일 공개했다. ‘원주 창의소 통문(原州 倡義所 通文)’이라는 제목의 이 격문은 날짜가 ‘을미 12월’(음력)로, ‘창의대장(倡義大將) 전 판서(前 判書) 김세기(金世基) 심상훈(沈相薰)’ 명의로 돼 있다.

김세기(1852∼1908)는 구한말 중추원 의관과 관찰사 등을 역임한 대신이며 심상훈(1854∼1907)은 이조판서와 궁내부대신 등을 지낸 고종의 최측근이었다.

이들은 격문에서 “이번 8월의 대변은 실로 천고에 없었던 일로 군부(君父·고종)를 협박하고 마침내는 저녁에 모후(母后·명성황후)를 혹독하게 시해하였으니 이는 불구대천의 원수로다”라고 분노한 뒤 “위로는 국치를 설욕하고 아래로는 백성이 바라는 뜻을 위로하여야 할 것”이라고 창의의 뜻을 밝히고 있다.

김세기와 심상훈은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사직하고 낙향했다. 김세기는 연안 김씨 집성촌인 원주 지정면 안창리로 갔으며, 심상훈이 낙향한 강원 영월군 주천면도 당시 행정구역상으론 원주였다.

김 연구원은 “당시 경기 양평과 여주에서 봉기한 의병이 원주 지적면 안창역에서 일단의 강원 지역 의병과 합류한 뒤 다시 충청 제천 의병과 합세해 충주성 공략에 나서게 된다”며 “이는 원주가 지리상 사통팔달의 위치여서이기도 했지만 의병군 자금을 댄 것이 김세기와 심상훈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심상훈은 두 아들을 직접 의병군에 참전시키기도 했다.

국사학계에서는 그동안 의병활동을 주로 재야 유생인 유인석(柳麟錫)과 이춘영(李春永) 등이 주도한 ‘밑으로부터의 봉기’로 해석했다. 다만 연세대 오영섭 연구교수(현대한국학연구소)가 1997년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에 기고한 논문 ‘한말 의병운동의 근왕(勤王)적 성격’에서 “의병활동은 고종과 주변 측근이 조직적으로 재야세력과 연합한 결과”라는 해석을 내놓아 학계에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오 교수는 “심상훈은 고종의 이종사촌으로 어린시절 함께 자란 최측근이었으며, 김세기 역시 인목대비를 배출한 연안 김씨 가문으로 왕실 측근이었다”면서 “이들 명의의 의병 격문이 발견됨으로써 고종과 그 측근의 적극적 구국활동을 입증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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