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꽝 벌린 장독대 항아리들 금줄에 걸린 햇살들이
때 절은 문지방 애써 기어오르다
고드름 끝에 쨍그랑 부서진다
그러자 직립으로 낙하하는 물방울 그 투명한 속살
그 살결 파고들어 마악 길 떠나려는 찰나
그 밑에서 한가하게 한 세월 좋게 넘어가던 고양이가
그만 그 살가운 파고듦에
밥그릇을 뒤엎고 등을 세우며 부르르 떨고 선다
내게 왔다가 가버린 사랑은 늘 그러하였다
-시집 ‘씨앗의 힘’(세계사) 중에서
‘동작 그만!’ 세상 만물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조리 발가벗긴 채 꽝꽝 언 들판에서 ‘얼차려’ 시키던 동장군(冬將軍)의 위용이 어째 무력해진 요즘이다. 조금만 더 있으면 저이의 기합소리가 대부분 허풍이었음이 드러나고야 말 것이다. 희끗희끗 앞산엔 아직 잔설 남아 있고 콧등을 스치는 바람은 매워도, 아지랑이 꼬불꼬불 올라가는 논바닥에 국수쟁이, 별금자리, 나신개 여리디 여린 이파리 새로 돋는 걸 보면 도대체 엄포 말고는 한 게 없다. 직위 해제된 늙은 동장군이 짚고 가는 고드름 석장(錫杖)이 삭아 뚝뚝 물방울 듣는다. 댓돌 밟고 오르다 툭- 목덜미 떨어진 물방울에 진저리치며 생각느니, 뭇 사랑은 얼마나 예고 없이 찾아오고 가뭇없이 사라져갔던가. 오소소 돋는 전율의 순간은 짧아도 기억은 오래 남는 것, 그것이 사랑인가.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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