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종영하는 SBS 주말극 ‘발리에서 생긴 일’(연출 최문석·밤 9·55)에 대해 시청자들의 궁금증이 고조되고 있다. 가난한 수정(하지원)과 인욱(소지섭), 부유한 재민(조인성)과 영주(박예진)간 사랑과 질투의 흐름이 섬세하면서도 종잡을 수 없어, 시청자들은 한 회가 끝날 때마다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기 바쁘다.
수정이 재민과 동침하기 전 “마음을 주지 않는 건, 내 마지막 자존심이예요”라고 한 게 무슨 뜻인지, 인욱은 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려다가 왜 택시를 돌렸는지를 놓고 토론이 벌어지기도 한다.
1월 3일 시작한 ‘발리…’는 최근 시청률 29%(TNS미디어코리아 조사)를 기록하며 막판 피치를 올리고 있다. 특히 부자(富子)와 빈자(貧子), 남녀 관계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면서 “매우 현실적인 설정이어서 더욱 실감 난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일단 이 드라마는 비극으로 끝난다.
인욱과 수정이 함께 발리로 가자 질투에 불탄 재민이 그들을 따라간다. 재민은 실수로 권총으로 두 사람을 쏴 죽인 뒤 죄책감으로 자살한다. 그런데 이런 파국은 질병으로 억지 죽음을 맞는 다른 드라마와 달리, 주인공들이 사랑과 부에 대한 욕망이라는 하마르티아(hamartia·비극을 피할 수 없는 성격적 결함) 때문에 자초한 측면이 있다.
작가 김기호씨도 “자기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의 이야기를 가장 현실적으로 그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발리…’는 부자와 빈자에 대해서도 종래 이분법의 잣대를 넘어선다. 지금까지 부자는 SBS ‘라이벌’(2002년)처럼 돈과 권력으로 빈자의 행복을 뺏으려 드는 악한이나 ‘천국의 계단’처럼 ‘백마 탄 왕자’로 그려졌다.
‘발리…’에서는 이 같은 선악 구분을 하지 않는다. 재벌 2세 재민과 그의 정혼자 영주는 가난한 인욱과 수정을 경계하면서도 그들을 파멸시킬 음모를 꾸미지는 않는다. 인욱과 수정도 속절없이 당하지만 않는다.
세파의 어려움을 모르는 철부지 같은 재민은 원하지 않는 결혼과 후계경쟁 등으로 고뇌한다. 인욱을 경계해 주먹다짐도 하지만 꼼수를 쓰진 않는다. 이 같은 캐릭터 덕분에 그는 “부자라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다”라는 동정도 듣는다.
수정은 노래방 도우미 등으로 힘겹게 살지만 ‘때 묻지 않은 캔디’는 아니다. 오히려 “돈 많은 놈 물어서 잘 살아보는 게 꿈”이라는 현실적 욕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인욱에게 끌리면서도 재민의 물량 공세를 뿌리치지 못하고 그와 먼저 동침한다.
인욱은 세상에 복수하고 싶어한다. 그는 수정에게 이탈리아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책을 건네며 ‘부자들의 헤게모니’에 대해 경고한다. 그러면서도 부자들의 시스템인 대기업에 들어가고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어 돈을 빼돌리려 한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는 “최근 빈부에 대한 선악의 이분법이 세상을 재단하기에 너무 빈약한 잣대라는 생각”이라며 “‘발리…’의 설정은 주인공 한 명뿐 아니라 각자 입장이 있는, 현실 세계에 아주 가까운 구도”라고 평했다.
‘발리…’의 남녀 관계도 현실적이다.
이 드라마에서는 ‘천국의 계단’의 권상우 신현준 같은 자상한 ‘온(溫)미남’이 없다. 오히려 지독한 부와 지독한 가난에 상처받은 차가운 ‘냉(冷)미남’만 있을 뿐이다.
SBS ‘아름다운 날들’(2001년) ‘유리구두’(2002년) 등 이전 드라마의 삼각관계는 한 여자를 둘러싸고 따뜻한 남자와 차가운 남자로 이뤄졌지만, ‘발리’의 주인공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수정은 현실과 타협하면서 돈에 끌리고, 인욱은 그런 수정에게서 자신을 보기 때문에 차갑게 대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에게 수정은 ‘구원’이 아니라 비루한 현실의 ‘거울’인 셈이다. 재민도 타인을 부드럽게 배려하는 태도를 익히지 못해 애초부터 자상함을 기대하긴 어려운 캐릭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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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복기자 kath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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