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산림학자인 저자가 쓴 ‘숲의 생활사’는 꽃을 기다리는 설렘이 더욱 커지는 초봄에 읽을 만한 책이다. 저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시간 순서에 따라 숲이라는 거대한 생명체가 탄생과 소멸을 거쳐 부활하는 역동적 과정을 다큐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간다.
“독특한 미각을 전해주는 봄나물. 그러나 봄나물의 쓴맛은 삶의 의지의 표현이다. 애벌레나 미생물의 공격을 한방에 날려 보내거나 식욕을 떨어뜨리기 위한 독물질이 사람의 미각을 자극하고 건강을 지켜주는 약으로 바뀐 것이다. 이 가련한 식물들은 제 몸 돌볼 요량으로 만들어낸 독한 맛이 예기치 않은 식탐가를 만나게 될줄 몰랐던 것이다.”
이처럼 이 책에 나오는 숲은 한가롭고 고요한 정(靜)의 세계가 아니다. 한정된 자원을 놓고 동물의 약육강식 세계처럼 식물들이 치열하게 투쟁하는 공간이다. 이러한 숲이란 식물사회의 위계질서를 만들어내는 가장 큰 법률은 ‘빛’이다.
숲 속의 나무가 잎을 피우는 데도 엄격한 서열이 존재한다. 봄의 야생화는 누가 볼세라 잎도 나기 전에 서둘러 꽃을 피운다. 빛의 양이 많아지면 크고 무성한 생명들이 지배권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무성한 잎들에 가려 숲 안으로 들어오는 빛이 전체의 25%에 불과해지는 여름은 ‘빛에 대한 불평등’이 가장 심화되는 계절. 이 때문에 봄이 아니라 가을에 새 삶을 시작하는 식물도 있다. 여름 내내 묵은 잎을 간직하고 있던 조릿대는 10월 햇살에 새 잎으로 갈아입고 12월 추위가 눈앞에 닥칠 때까지 가을을 여름같이 살아간다. 동물과 달리 한정된 자원(빛)을 놓고 사생결단 싸우기보다는 시간과 공간을 나눠 빛을 공유하는 것이 숲 속 사회의 지혜임을 알 수 있다.
‘생명의 숲 가꾸기 운동본부’ 운영위원이기도 한 저자는 10여년간 숲을 탐방하며 ‘숲 강의’ 전도사 역할을 해왔다. 앞선 저서 ‘신갈나무 투쟁기’와 ‘우리 숲 산책’에서 나무나 숲의 시각으로 그들의 삶을 풀어냈던 그는 이 책에서도 생태학적 전문지식을 날것으로 쏟아내기보다는 “가을은 겨울을 준비하라는 자연의 관용이다”와 같은 비유적인 문장으로 관조하듯 숲을 바라본다. 또한 안개 낀 소나무 숲의 풍경과 땅바닥을 기어가면서 자라는 사스래 나무 등 200여컷에 이르는 생태사진은 한편의 다큐멘터리처럼 숲의 디테일을 묘사한다.
저자는 “숲을 다녀보면서 사람은 숲 없이 살 수 없지만 숲은 사람 없이도 아주 잘 살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며 “숲에 대한 사람들의 자만을 무너뜨리기 위해 강의를 하면서, 나는 거의 투사가 됐다”고 말한다. 그는 지구상에 유일한 ‘1차적 생산자’이며 생산-소비-분해가 완벽하게 이뤄지던 숲이 지구온난화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고 경고한다.
“예전엔 이른 봄 진달래가 피고 늦봄에 철쭉이 피어났는데, 요즘엔 진달래와 철쭉이 함께 피고 꽃과 잎이 뒤섞여 난다. 섣불리 개화한 식물은 미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곤충들에게 꽃가루받이를 하지 못하고 쭉정이로 말라 비틀어져간다. 잠에서 깨어난 애벌레는 신록이 너무 빨리 성장해 질겨진 잎을 먹지 못한다. 지구온난화는 바닷물 수위만 높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숲에서 꽃들이 씨앗을 맺지 못하게 하고, 애벌레가 나비가 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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