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싸리나무의 황홀한 함성…심수구씨 개인전

  • 입력 2004년 3월 14일 17시 36분


대형 나무판에 작은 싸리나무 조각들을 촘촘히 채워 나가는 나무작품을 선 보이는 작가 심수구. 전업작가였지만 30여년 동안 비평과 화단의 관심에 비켜 서 있던 그는 최근 열린 스페인 마드리드 국제 아트페어에서 출품작이 모두 매진되어 주목받는 작가가 됐다. 울산=허문명기자
대형 나무판에 작은 싸리나무 조각들을 촘촘히 채워 나가는 나무작품을 선 보이는 작가 심수구. 전업작가였지만 30여년 동안 비평과 화단의 관심에 비켜 서 있던 그는 최근 열린 스페인 마드리드 국제 아트페어에서 출품작이 모두 매진되어 주목받는 작가가 됐다. 울산=허문명기자
지난달 12∼16일 스페인 마드리드 아르코 국제 아트페어는 세계무대에 첫 진출한 한 무명의 한국작가를 ‘스타’로 부상시켰다. 30여년 전업작가 생활동안 10회의 개인전을 가졌지만 국내 비평과 저널의 관심에서 비켜 서 있던 작가 심수구(55). 그는 아르코 개막 이틀 만에 출품작 4점이 모두 팔려 국내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10년 동안 국내 개인전을 통해선 단 3점의 작품만 팔았다는 점과 비교해 보면 해외반응은 뜨거운 것이었다.

○스페인 아트페어서 출품작 모두팔려

대형 나무 판넬에 길이 3cm로 자른 싸리나무들을 촘촘히 채워 나가는 그의 작품은 수공업적 노동이 배인 손맛이 동양적 깊이를 함축하면서도 살아있는 생물을 화면으로 옮긴 생태적 작품이라는 평을 들었다.

아르코 아트페어의 여세를 몰아, 오는 16일부터 서울 잠원동 갤러리 우덕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갖는 그를 만나기 위해 울산 작업실을 찾았다.

울산광역시 남구 신정동 한 아파트 건물 지하에 마련된 작업실은 초라했지만 구석구석에서 후끈한 열기가 전해져왔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어두침침한 이 곳에서 온전히 작업에만 매진하는 작가의 창작 에너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업실은 목공소 같았다. 한쪽에는 자르고 말린 싸리나무 조각들을 가득 담은 마대자루가 쌓여 있었고 또 다른 쪽에는 작두, 목공용 가위, 본드, 나무 벌레 퇴치용 약품 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마드리드 전시장을 찾았던 외국인들은 작가가 선택한 ‘싸리나무’라는 재료에 호기심이 많았다. 왜 하필 싸리나무였을까.

“싸리나무는 초가집 울타리, 마당을 쓸어 주는 빗자루등 예부터 우리 일상 깊숙이 들어 온 재료지요. 지금도 산에 가면 흔합니다. 어릴 적 과수원에서 자란 덕분에 나무와 친숙한 탓도 있었겠지만, 결국 싸리나무라는 재료로 결론짓기까지는 긴 우회가 있어요.”

그는 본래 미니멀리즘에 몰두했던 추상작가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작품을 발표했고 70년대에는 현대 판화그랑프리전, 판화 앙데팡당전에서 각각 우수상을 받았으며 1979년엔 중앙미술대전 특선을 수상해 회화적 역량을 입증 받아왔다.

그러나 갈수록 미니멀 추상이라는 장르에 의문과 염증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그린다’는 행위보다 사유가 앞설수록 그는 자신이 딛고 있는 땅과 치열한 현실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급기야 10여 년 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울산으로 내려 와 더욱 더 자신을 안으로 가두면서 캔버스와 씨름해 나갔다. 그는 우직하게 살아 온 지난 시간을 곱씹으면서 마음이 쓸쓸하고 헛헛할 때 무작정 산과 들과 바닷가를 쏘다녔다.

○‘노동을 통한 실존의 깨달음’ 감동적

심수구 작 '열매처럼'(2003년).

“자연 속에서 만난 풀, 나무, 돌, 흙, 언덕들이 마치 내 것처럼 다가왔어요. 어느 날 시골 처마 밑에 쌓여있는 장작더미를 보면서 영감이 떠올랐지요. 저 것을 화면에 옮겨보면 어떨까 하고요.”

산에서 가장 흔하게 만났던 싸리나무를 화면에 옮기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됐다. 나무를 베고 자르고 운반하고 말리고 끝을 일일이 촛불로 태운 뒤 판넬 위에 붙이고 약품처리를 하는 고된 노동은 결국 작가 자신을 변화시켰다.

이념, 사상, 거창한 논리를 헛되고 소모적인 시간과 노동으로 대체하면서 그는 자신을 오랫동안 묶어 놓았던 관념의 덫에서 벗어났다.

수없는 반복으로 그가 화면에 심은 대지는 숲이고 자연이다. 물가나 모래밭 같기도 하고, 하늘에서 내려다본 갈라진 논바닥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따뜻하고 친근하고 해학적이다. 미술평론가 윤진섭 교수(호남대)는 “그의 우직하고 끈기 있는 노동이 배인 나무작업은 가상의 허구가 아니라 손으로 만지고 냄새 맡을 수 있는 실존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평했다. 가로 2m 세로1m가 넘는 대작들을 비롯해 20여점이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26일까지 이어진다. 02-3449-6071

울산=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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