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조은, “궁궐 앞길을”

궁궐 앞길을

-조은

궁궐 앞길을 모녀와 걸어간다

앞을 못 보는 아이는 열한 살이다

엄마는 나보다 열 살쯤 젊다

둘은 온몸으로 계단을 밟고 4층에서 내려왔고

나는 관성으로 계단을 내려와 길을 밟았다

어두워지는 길을 우리는 한 방향으로 걷는다

둘은 온몸을 바닥에 귀처럼 대고 걷고

나는 길을 걷어차듯 걷는다

둘은 팔을 겨드랑이에 붙이고 걷고

나는 두 팔을 너풀대며 걷는다

한 번도 이 세상의 모양새를 보지 못한

아이는 해맑고

마르고 창백한 엄마의 얼굴은

연마된 쇠처럼

나는 한량처럼

-시집 ‘따뜻한 흙’(문학과지성사) 중에서

보폭을 줄이며 저 모녀들의 걸음을 살피느라 시인의 발걸음이 꼬이기도 했을 것이다. 애꿎은 돌부리 걷어차며, 내가 누리는 행복 가운데 하나도 고마워하지 않았던 것들의 목록이 새록새록 떠오르기도 했을 것이다. 궁궐 앞길을 다 걷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마음은 젖었지만 깊어졌을 것이다.

구절양장 굽은 길을 펼쳐놓은들 눈 감은 이와 눈 뜬 이가 함께 출발하는 삶의 여로는 얼마나 불공평한가. 왜 거북은 걷고 두루미는 나는가? 그러나 실은누구의 삶이든 등가량(等價量)의 고통과 행복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한 번도 이 세상의 모양새를 보지 못한 아이는 해맑고’, ‘연마된 쇠처럼 단단한 엄마의 얼굴’에 조금은 안도하지만 내내 저미는 가슴은 무엇때문인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는 모두 ‘어두워지는 길을 한 방향으로’ 걷고 있다. 가서 마침내 어둠이 될 것인가, 별이 될 것인가.

반칠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