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는 주류라는 말을 거북스러워했다. 흔한 겸사(謙辭)이거나 주류이면서도 주류적 사고로 전환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요즘 세태가 떠올랐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는 다른 뜻이 있었다.
“나는 쇠락한 종갓집 종손이라고 생각해왔어요. 학생 때부터 오늘까지 ‘전통’은 짐이었고 갈등이었습니다. 눈부신 바깥바람을 쏘이면서 뛰쳐 나가고 싶은 충동이 있었지만 잡초 무성한 종가를 돌봐야 했기에 주저앉아야 하는 현실이 나를 때로 휘청거리게 했어요.”
그의 토로는 한국 화단의 어떤 계보보다 명확한 서울대 동양화과에서 그의 위상을 꼽아볼 때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전통과 현대’라는 화두를 들고 고민해 온 사람답게 그의 몸짓이나 말투에서는 절제와 자유, 세속과 탈속 등 상반된 가치들이 교묘하게 오갔다. 그가 걸어 온 길은 얼핏 탄탄대로였지만 내면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 연탄가스로 죽음문턱서 회생 후 예술세계 변화
이런 넘나듦은 1988년 첫 개인전에서 선택한 황진이, 춘향, 예수를 통해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당시 전시에서 ‘뜻을 세웠으나 넘어지고 좌절하여 피투성이가 된 인물’들을 조명했다. 특히 가시 면류관을 쓰고 뺨에 한 방울 눈물이 맺힌 예수를 골판지에 먹으로 그린 ‘바보예수’ 연작은 화단에 충격을 던졌다. 그것은 최루탄이 난무하는 교정에서 시대를 고민하며 내놓은 고뇌의 산물이자 슬픈 패러디이기도 했다.
첫 개인전에 대한 반향은 컸으나 정작 작가는 외로웠다. 전통을 벗어난다는 것, 기성의 가치관과 방법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청년 김병종의 피를 뜨겁게 했지만, 좌절하게도 만들었다.
그로부터 1년여 뒤인 89년 11월. 그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회생하는 뜻밖의 경험을 한다.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서 밤 새워 원고를 쓰다 연탄가스에 중독됐는데 응급처치가 늦어 빈사지경에까지 이른 것. 불구까지 대비해야 했던 대수술과 뒤 이은 투병은 그의 삶과 예술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90년 첫 봄. 나는 온전치 못한 몸을 끌고 들로 산으로 숲으로 돌아 다녔다. 그러면서 온 천지에 흐르는 생명의 기운을 느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거대한 창조 미술관이었다. 병약할 때 오히려 생명을 노래하게 하는 그 붓의 끌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작가노트 중)
○ 물고기… 구름… 나비… 강… ‘생명의 기쁨’ 화폭에
26일∼4월18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생명의 노래’ 전은 5년 만에 열리는 대규모 개인전이다. 9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생명’을 소재로 한 근작 50여점이 나온다. 소나무와 강과 숲과 구름과 바람이 소년, 나비, 물고기와 더불어 생명의 기쁨으로 뒤엉켜 있는 화면에선 시간을 잊게 하는 평온함과 물아합일(物我合一)의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또 누르스름한 닥종이 바탕에 거칠지만 강한 필선에는 고구려 벽화부터 조선 문인화, 민화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고 끈질기게 공부한 그의 이력이 고스란히 육화(肉化)되어 있다. 마치 옛 토담과 장판을 대하듯 정겨우면서도 따뜻하다.
이번 전시에는 특히 어린 시절에 놀던 물가의 동심을 살려 물의 기운을 필획의 기(氣)로 풀어 낸 ‘어락(魚樂)’ ‘수무어무인무(水舞魚舞人舞)’ ‘산첩첩 물결겹’ 등이 눈에 띈다. 프랑스의 미술평론가 미셀 누리자니는 도록에서 “그의 화면에 서구인들이 첫 눈에 사로잡히는 것은 굵은 붓자국들이 보여주는, 무아의 지경을 넘나드는 듯한 기이하고 자유로운 필치”라며 “그의 그림에는 균형과 절제를 뛰어넘는 강렬함과 긴장이 내포돼 있다”고 평했다.
그의 그림에서는 상생과 사랑과 만남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더 따뜻하고 더 사람냄새 나는 것들을 그리고 싶다는 그와 그의 그림들을 만나고 돌아오니, 어수선한 마음 한켠이 가라앉고 훈훈해졌다. 02-720-1020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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