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수상기 여러 대를 설치해 비디오로 표현하는 백남준과 가로 세로 각각 3인치(7.6cm) 크기의 나무판 수천 또는 수만개에 그림을 그리는 강익중. ‘한국 출신의 독창적인 이민 작가’라는 점에서 미국 화단이 이들을 주목했던 것이다. 강익중은 “현대미술의 메카인 휘트니의 초대인 데다 거장 백남준 선생과의 2인전이라고 해서 기쁘기에 앞서 당황스럽기만 했다”고 회고한다.
‘3인치 작가’ 강익중이 국제무대에서 더 화려한 조명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3년 뒤. 1997년 세계 최고 권위의 베니스 비엔날레에 한국관의 초대작가로 선정됐다.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이 국제전시회에서 그는 ‘영어를 배우는 부처’ 등 세 작품으로 특별상을 받았다. 커뮤니케이션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었다.
작가의 개성을 중시하는 미술 분야에선 작품을 비교해 등위 정하기를 꺼리지만 비엔날레는 시상제도를 운영한다. 베니스 비엔날레의 경우 대상(황금사자상), 4명가량에게 주어지는 특별상, 젊은작가상 등이 있다. 한국인으로는 1993년 독일관의 대표로 참가한 백남준이 대상을 받았다. 이어 1995년 전수천, 1997년 강익중, 1999년 이불이 특별상의 영예를 안았다.
“뉴욕에서 학교에 다니면서 청과상과 옷가게에서 일을 했습니다. 지하철로 오가면서 짬짬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손에 쏙 들어가는 작은 캔버스가 필요했습니다. 커다란 캔버스를 살 돈이 부족한 때문이기도 했지요. 두 눈 사이의 거리만 한 캔버스가 좋을 것 같았고…. 3인치 캔버스는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1년 만에 1000개가 모아져 1985년 첫 전시를 했습니다.”
그의 그림판은 고생의 산물이지만 그의 사연이 담긴 독창적인 개발품이기도 하다. 초기 캔버스는 사각형 틀에 천을 씌운 형태였다. 서울 청계천에서 구입한 작은 스피커를 천 뒤에 붙여 물소리 새소리 등 음향효과를 내는 것도 있다. ‘그림+소리’란 개념으로 뉴욕에서 선보여 비평가들의 찬사를 들었다. 요즘은 소나무판에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한다. 플라스틱이나 세라믹 등으로 작업 대상이 확대돼 갔다.
시간이 갈수록 전시되는 그림 수가 불어났다. 3000개, 6000개, 2만개…. 백남준과의 2인전엔 나무판 3만개가 들어갔고 베니스 비엔날레에는 1만2000개가 설치됐다. 지금까지 약 10만개를 그려냈다. 그는 요즘도 뉴욕 브루클린의 스튜디오에서 대형 프로젝트를 위해 하루 10시간씩 작업을 한다. “숫자 세기를 좋아한다”는 그는 “앞으로 50만, 100만, 남북한을 합친 7000만도 머릿속에 있다”며 장래의 작업을 암시하기도 했다.
그의 인기 비결 중 하나는 세상 사람들과 그림을 함께 그리는 것. 유엔본부에서 전시한 ‘놀라운 세상’은 135개국 어린이들이 보내 온 그림 3만8000여개로 꾸며졌다. 남북한을 잇는 프로젝트로 시작했다가 북한측의 불참으로 한국 어린이 작품 5만개를 경기 파주시에서 전시한 ‘10만의 꿈’도 같은 방식이었다. 그는 이 전시를 “나의 대표작”이라며 아낀다.
4월 초 뉴저지주 프린스턴시 공립도서관 로비에 설치될 벽화 ‘행복한 세상’에는 주민들이 참여한다. 나무판 그림 4000여개 중 일부에 주민들이 내놓은 소장품들을 부착하게 된다. 주민 가운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후손이 아인슈타인의 담배파이프를 기증했고 노벨상, 퓰리처상 수상자 20여명이 메모나 서명을 보내 왔다. 프린스턴 고고학협회는 2억년 된 돌을 보내 왔다. 가족사진이나 배지, 자녀가 쓰던 장난감 등 주민들이 보낸 물품이 여러 개의 박스에 가득하다.
“제 작품은 그림으로 벽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함께 참여하면 마음의 벽이 허물어집니다. 프린스턴시의 경우 백인과 유색인종간에 대화나 교류가 거의 없이 살아 왔습니다. 이런 주민이라도 작품에 설치될 기념품을 내놓는 순간 서로 연결되고 맙니다. 주민 설명회에서 이렇게 설명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참여하겠다고 하지요.”
강익중은 뉴욕을 중심으로 한 미국화단과 독일 등 유럽화단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치고 올라오려는 사람이 워낙 많아 인기는 오래 가지 못한다”는 생각이다. 그의 말대로 ‘애당초 미술로 성공하려는 야망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그는 동남아에서 청소년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살려고 했다. 그러다 ‘세상을 잘볼 수 있는 더 큰 창’을 찾아 미국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는 “건강을 위해 줄넘기를 하듯 세상을 이해하는 방편의 하나로 그림을 그렸다”고 말하지만 뉴욕 진출 20년 만에 개인전과 2인전 35회, 그룹전 39회를 소화해냈다.
강익중은 4건의 대형 공모전에서 선발돼 뉴욕 지하철역 등에 작품을 설치해 놓았다. 1994년엔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 청사에 벽화를 설치했다. 공항 한가운데 벽화가 자리 잡자 공항 설계자인 크레이그 하트만은 “이 공항은 당신을 위해 지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응모하지 않아도 주최측이 그의 이름을 최종후보에 올려놓고 프레젠테이션을 거쳐 작품을 맡긴다는 점. 그가 추구하는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한 곳이 더 많아진 때문인 것 같다.
“분단국가 출신인 한국인은 세계 곳곳의 분열을 치료할 수 있는 백신을 만들 수 있다”는 그의 ‘그림 철학’이 현실화되는 것 같다. 요즘 강익중은 임진강에 남북을 잇는 다리를 놓고 세계 어린이들의 그림판을 설치하는 꿈을 키우고 있다.
●강익중씨는
△ 1960년 충북 청주 출생
△ 1984년 홍익대 서양학과 졸업
△ 1985년 롱아일랜드대에서 그림판 1000점 첫 전시
△ 1987년 미국 뉴욕의 프랫 아트인스티튜트 졸업(석사)
△ 1994년 휘트니 미술관에서 백남준과 2인전 '멀티플 다이얼로그' 전시
△ 1994년 샌프란시스코 캡스트리트 프로젝트 '모든 것을 함께 넣어 더하다'(2만점)
전시
△ 1994년 샌프란시스코 공항 벽화 설치
△ 1997년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참가, 특별상 수상
△ 1999년 경기 파주시에서 '10만의 꿈(5만점)' 전시
△ 2001년 유엔본부에서 '놀라운 세상' 전시
△ 2004년 4월 미 프린스턴시 도서관 벽화 설치 예정
△ 2004년 5월 켄터키주에서 '강익중전' 예정
뉴욕=홍권희특파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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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가 통해요”▼
美 2인전때 “더 좋은 자리주라”
백남준의 특별한 ‘강익중 사랑’
‘…중요한 것은 강익중의 작품을 더 좋은 곳에 설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994년 백남준과 강익중의 2인전을 준비하던 미국 뉴욕의 휘트니 미술관에 당시 독일에 일시 체류 중이던 백남준에게서 팩시밀리로 편지가 날아왔다. 62세의 세계적인 대가가 34세의 신참작가에게 더 좋은 자리를 양보한다?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백남준의 ‘후배 사랑’은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강익중이 백남준을 처음 만난 것은 1990년대 초 뉴욕 소호의 한 화랑에서 열린 그룹전 때. 강익중이 한국인이란 것을 한눈에 알아챈 백남준은 기뻐하며 그의 이름을 물은 뒤 세 가지 충고를 해줬다.
‘그림을 싸게 팔아라. 여행을 많이 다녀라(전시를 많이 하라는 뜻). (미국은 파티 중심 사회이므로) 파티에 많이 다녀라.’ 멜빵에 매달린 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백남준이 “빠이빠이” 하면서 자리를 떠나자 주위의 다른 나라 화가들이 강익중 주위로 몰려들었다. 강익중의 설명은 간단했다. “그냥, 한국사람끼리 하는 이야기야.”
백남준은 뉴욕 거리에서 강익중을 만나면 가까운 후배 대하듯 “야, 강익중” 하고 불렀다. 강익중은 그를 마음 속의 스승으로 모셨다. 유럽에서 활동도 하기 전에 강익중의 이름이 독일 화단에 먼저 알려진 것도 백남준이 후배를 적극 ‘선전’한 덕분이라고 지인들은 말한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 충돌을 이민 작가의 관점에서 표현해 낸 두 사람은 예술적 코드가 맞는 때문인지 비슷한 소재를 쓰는 것을 보고 서로 놀라기도 했다. 한국문화의 특성을 ‘여러 가지를 함께 넣고 비비는 비빔밥’이라고 해석하고 ‘비비기’ 표현기법을 즐기는 것도 공통점이다.
뉴욕=홍권희특파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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