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졸 약간과 더불어 요관(嶢關)을 빠져나간 주괴(朱괴)는 날이 샐 무렵에야 달아나기를 멈추고 뒤따라온 군사들을 수습해 보았다. 보기(步騎) 합쳐 몇 백 명밖에 되지 않았다. 주괴가 낙담해 있는데 갑자기 요란한 발굽소리와 함께 한 떼의 인마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적이 어느새 여기까지 따라왔구나!”
주괴가 그렇게 탄식하면서 다시 달아나려는데 졸개 하나가 소리쳤다.
“다가오는 것은 적병이 아닌 듯합니다. 기치가 정연하지 못하고 황급히 쫓겨오는 형색인 걸로 보아 우리 군사들 같습니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린 주괴가 새벽 으스름 속에 다가오는 군사를 살펴보니 정말로 그랬다. 자신을 뒤쫓는 초나라 군사가 아니라 관(關)을 버리고 도망쳐오는 진나라 군사들이었는데, 앞장서 달려오는 것은 다름 아닌 부장(副將) 한영과 사마(司馬) 경패였다.
“밤새 장군을 찾았습니다. 무사하셔서 실로 다행입니다.”
주괴를 알아보고 달려온 한영과 경패가 멀쩡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요관을 버린 게 간곳 모르게 없어진 주괴를 찾기 위해서였다고 우기는 듯했다. 주괴도 애써 부끄러움을 감추고 분한 기색으로 받았다.
“우리가 간사한 초나라 놈들에게 속았소. 관문을 열어주겠다는 데 굳이 치고 들 줄 누가 알았겠소?”
“간사할 뿐만 아니라 표독스런 놈들입니다. 반드시 뼈아픈 일패(一敗)를 안겨주어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경패가 그렇게 말했고 한영도 맞장구를 쳤다.
“그렇습니다. 흩어진 군사를 모아 맞받아 쳐야 합니다. 저희들이 데려온 것만 해도 천명은 넘고, 또 쫓기며 뒤따라오는 보졸(步卒)들이 많았으니 이쯤에서 수습하면 수천 군사는 모을 수가 있습니다. 그들을 알맞은 곳에다 숨겨두고 기다리다가 한번 역습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뒤쫓아오는 적병이 있다 해도 대군은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패공이란 자가 악착스럽다 하더라도, 밤길을 재촉해 달려온 뒤인 데다 굳은 요관을 치느라 지쳐빠진 군사를 한꺼번에 내몰 수는 없습니다.”
주괴도 들어보니 옳은 소리 같았다. 잘만 되면 관을 잃은 죄를 씻을 뿐만 아니라 공을 세울 길도 있어 보였다. 주괴가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고 한영, 경패와 함께 패군(敗軍)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한나절을 기다리며 이리저리 긁어모아 보니 밤사이 요관을 도망쳐온 군민(軍民)이 5천에 가까웠다. 주괴는 그들을 풀어 인근의 장정들을 끌어내게 하는 한편 가까운 남전(남田)으로 사람을 보내 구원을 빌었다. 해가 지기 전에 남전에서 다시 3000명을 보내와서 그날 주괴가 모은 군사는 그럭저럭 1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주괴는 남전 남쪽 길목에 군사를 감추고 뒤쫓는 초나라 군사들이 이르기를 기다렸다. 간밤의 승리에 취해 많지 않은 군사로 서둘러 뒤쫓아온 그들을 쳐부수어 승세를 탄 뒤 뒤따라오는 패공의 대군을 역습하겠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패공이 이끄는 초나라 군사들은 그날 밤이 자나고 다음날이 되어도 뒤쫓아 올 줄 몰랐다. 하루를 더 기다려 답답해진 주괴가 사람을 풀어 알아보니 뜻밖의 소식이 들어왔다.
“초나라 군사는 오늘 아침에야 모든 군사를 한꺼번에 움직여 요관을 출발했다고 합니다. 행군이 아니라 산보라도 하는 것처럼 느릿느릿 다가오는데, 깃발은 들판을 덮고 번쩍이는 창칼은 멀리서 보기에도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패공은 거느린 군사들에게 엄명을 내려 백성들의 재물은 터럭하나 건들지 못하게 하니, 백성들은 마치 이기고 돌아오는 저희 군사를 맞듯 초나라 군사들을 반기며 스스로 그들에게 술과 밥을 갖다 바치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뿐만이 아니었다. 다음날은 더욱 기막힌 전갈이 들어왔다.
“백성들이 귀뜸을 해주어 초나라 군사는 저희들이 숨은 골짜기를 알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길을 바꾸어 남전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주괴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곧 한영과 경패를 불러 의논했다.
“적이 우리의 매복을 알고 길을 돌아 남전으로 가고 있다하니 어찌하였으면 좋겠소?”
“그렇다면 우리가 적을 찾아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불시에 들이치면 작은 군사로도 대군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경패가 그렇게 나왔다. 너무도 어이없게 요관을 잃은 일이 새삼 걱정스러워진 듯했다. 한영도 그대로 달아날 수는 없다 싶었던지 경패와 뜻을 같이 했다.
“그렇소. 우리가 한번 크게 공을 세워 요관을 잃은 죄를 덜지 않으면, 함양으로 돌아간다 해도 성하게 살아남기는 어려울 것이오, 물러나더라도 되든 안되든 오늘 밤 한번 부딪혀 본 뒤에 물러납시다.”
주괴가 그렇게 말하고는 야습을 준비했다.
하지만 백성들의 마음이 돌아 서버렸으니 야습마저 뜻 같지 못했다. 주괴 나름대로는 몰래 군사를 움직인다고 삼경에 하무까지 물리고 진채를 떠났으나 그 소문이 먼저 초나라 군사들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어렵게 초나라 진채에 닿았을 때는 이미 패공이 대군을 풀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되겠다. 남전으로 가보자. 그곳 현령과 힘을 합쳐 다시 적을 막아보자!”
싸움다운 싸움도 해보지 못하고 군사를 태반이나 잃은 주괴가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며 소리쳤다. 한영과 경패도 딴소리를 할 처지가 못되었다. 주괴를 따라 남전으로 달아났다.
남전 현령은 주괴가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 며칠 전 주괴가 위급하다는 전갈과 함께 구원병을 청해와 군사 3천을 보내놓고 뒷소식을 기다리는데, 주괴가 군사 몇 백과 함께 새벽같이 달려와 성문을 두드렸다. 성문을 열어준 현령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주괴에게 물었다.
“나는 장군을 믿고, 있는 군사 없는 군사를 다 긁어 3천을 보냈는데 어찌된 셈이오? 요관은 어찌하여 그리 쉽게 적군에게 떨어졌고, 그곳을 지키던 군사들은 모두 어디 갔소? 도대체 얼마만한 적군이 관중으로 들어왔다는 것이오?”
“적군은 패공 유방이라는 자가 이끄는데 그 머릿수가 5만이나 된다 하오. 무관을 깨뜨린 뒤에 보름이나 군사를 쉬게 하면서 군량과 병참을 갖춘 터라 그 기세가 여간 사납지 않았소이다. 거기다가 먼저 사자를 보내 화평을 의논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들이치는 바람에 낭패를 당하고 말았소.”
주괴가 그렇게 둘러댔다. 현령이 더욱 낙담한 표정으로 받았다.
“그렇다면 이 작은 성에서 버텨보기는 틀린 일 같소. 장군께 보내드린 3천을 빼면, 성안에는 싸울만한 사람이 많지 않고, 모아둔 군량도 없소이다. 거기다가 성벽마저 낮고 얇으니 무슨 수로 한창 기세가 오른 5만 대군을 당해내겠소?. 차라리 성을 버리고 패상(覇上)으로 물러나는 게 낫겠소이다. 패상은 위수(渭水)의 한 갈래인 패수(覇水)가에 있는 크지 않은 현이지만, 산 하나만 넘으면 함양(咸陽)이라 지키는 군사도 많을 뿐만 아니라, 함양으로부터 대군의 구원을 바랄 수도 있소.”
그때 다시 경패가 나섰다.
“현령께서도 진나라의 엄한 법을 잘 고 계실 것이오. 장수가 싸움 한번 않고 지키는 땅을 적군에게 내어주면 어찌되겠소? 설령 함양까지 무사히 돌아간다 해도 끝내는 목이 어깨 위에 남아나기 어려울 것이오.”
“그렇소. 가진 힘을 다해 적과 맞서본 뒤에야 국법에 용서를 구할 수 있소. 정히 성안에서 싸우기 어렵다면 지리(地利)를 얻을 수 있는 곳에 매복했다가 적에게 한바탕 크게 타격을 주고 패상으로 물러나야 할 것이오.”
한영도 경패를 거들어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남전 현령이 자신 없어하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글럼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 여기서 북쪽으로 2십리쯤 가면 대군이 패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할 골짜기가 있소. 남은 군사를 긁어모아 그곳에 매복하는 한편 지금 당장 패상에 사람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는 게 어떻겠소? 패상에는 3만이 넘는 대군이 있으니 제때에 구원을 와준다면 먼 길을 온 초나라 군사 5만쯤은 당해낼 수도 있을 것이오.“
그러자 주괴가 주먹을 움켜쥐며 현령의 기운을 돋워 주었다.
“그것 참 좋은 계책이오. 우리에게 그곳이 어딘지 일러주시고 얼른 패상으로 사람을 보내시오. 함양을 지켜내고 못 지켜내고는 이번 싸움에 달려있다고 한다면 패상 수장(守將)은 모든 군사를 들어 우리를 도울 것이오!”
이에 현령은 그 자리에서 사람을 패상으로 보내 남전의 급한 사정을 알리고 대군을 내어 구해주기를 빌었다. 그런 다음 성을 버리고 주괴 등과 더불어 남전 북쪽 관도(官途)가 지나는 골짜기에 군사를 감추었다.
그때 패상을 지키던 진나라 장수는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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