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시대 가로지르기]<6>대립-분열…돌파구 찾아라

  • 입력 2004년 3월 28일 18시 55분


이성형 위원은 “보수 진보 양측의 대립이 심화될 때 아르헨티나에서처럼 ‘원한의 체계’가 굳어질 우려가 있다”며 국민의 참여 폭은 넓히되 대의제는 강화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김미옥기자
이성형 위원은 “보수 진보 양측의 대립이 심화될 때 아르헨티나에서처럼 ‘원한의 체계’가 굳어질 우려가 있다”며 국민의 참여 폭은 넓히되 대의제는 강화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김미옥기자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한편에서는 대의민주주의를 무시하고 대중을 자극해 거리로 내몰았다며 저열한 ‘포퓰리즘(populism)적 선동’이라고 비난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국회가 국민의 정서를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시민의 정치참여를 인정하라고 주장한다. 라틴아메리카 정치를 전공한 이성형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45)은 이런 감정대립의 골이 깊어질 때 아르헨티나처럼 양 집단간 대화가 불가능한 ‘원한의 체계’로 굳어질 우려가 있다며 ‘참여시대의 대의민주주의’를 제안한다.》

●‘원한의 체계’만은 막자

“한국 사회 내 두 집단간의 ‘다름’이 ‘적대감’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국민을 구성하는 정서적 인지적 공통분모가 약화돼 가고 진보와 보수가 대화할 수 있는 공론의 장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 듯해요. 한 사회 내에 같이 살긴 하지만 이른바 ‘말이 통하지 않는’ 두 개의 정서집단으로 쪼개지고 있습니다.”

이 연구위원은 북한, 미국, 이라크 파병, 박정희 김대중 전 대통령,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이란 주요 ‘정치적 기호’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탄핵 정국’을 계기로 강렬하게 표출된 대립이 이대로 치닫는다면 한국 사회에서도 분열이 ‘원한의 체계’로 굳어질 위험이 있어요.”

1940년대 아르헨티나에서는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지주과두제 세력에 맞서 노동자세력이 후안 도밍고 페론 대통령과 그의 아내인 에비타(에바 페론)를 통해 한풀이 정치를 했다. 하지만 그 결과 아르헨티나 사회는 지금까지도 ‘두개’로 완전히 분열돼 있다.

●보수세력의 인지적 불일치

그는 먼저 보수세력의 인식 전환을 촉구했다. 포퓰리즘이란 비판은 한국 정치의 현 단계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연구위원은 한국 사회에서 포퓰리즘이 흔히 ‘대중영합주의’라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포퓰리즘의 정확한 의미는 ‘민중주의’라고 지적했다. 특히 제도화된 언론, 다양한 시민참여 통로, 강력한 야당, 절차적 민주주의 등을 이미 갖추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민중주의는 소득 재분배를 위해 임금을 인상하고 가격을 통제하는 민중 중심의 경제정책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경제적 민중주의’로 한정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 조작 가능한 대중도, 민중주의적 경제정책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현 상황에서 이런 용어를 쓰는 것은 보수엘리트들의 ‘인지적 부조화’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라는 지적이다.

“거리에 나온 사람들은 누군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끌려나온 게 아니죠. 인터넷이나 모바일통신 등을 통해 서로 의견을 주고받다가 나온 사람들, 가족의 손을 잡고 나온 30, 40대 화이트칼라들이 상당수라는 사실을 인정해야지요. 요즘 일부 지식인들이 사용하는 ‘사이버포퓰리즘’이란 말은 이런 맥락에서 형용 모순의 용어입니다.”

이 연구위원은 “지난 40년간의 산업화, 민주화, 탈냉전을 거치며 세상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보수세력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참여만능주의도 경계해야

그는 ‘참여만능주의’에도 반대한다.

“참여만능주의는 지역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를 부추길 수 있고 중요한 결정을 무한정 미루는 폐단도 낳을 수 있어요. 시민의 ‘참여’는 대의제의 보완물일 뿐이지 대의제 자체를 대체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대의민주주의일 수밖에 없습니다.”

참여민주주의 또는 직접민주주의는 대규모 인구의 정치적 의견을 표현하는 방법으로는 맞지 않고 복잡한 기술적 해결을 요구하는 각종 사안의 해결책도 왜곡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회가 민주화됐으므로 밀실행정에서 벗어나 정보를 최대한 공개하고 대안 제시 능력을 가진 지식인 집단이 공개논의를 통해 정책의 방향을 잡아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의제의 실현을 위해 그가 또 한 가지 지적하는 것은 대선과 총선 시기의 일치. 미국 프랑스를 제외하고는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한 대부분 나라의 경우 여소야대가 정치적 파행과 혼란으로 귀결됐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선거와 총선을 2년 간격으로 치르고 있는 현행 제도를 바꿔 대선과 총선을 한꺼번에 치러 4년 동안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고 4년마다 국민의 심판을 받도록 할 것을 제안했다. 대통령과 의회가 서로 견제하기보다는 일관되게 정책을 추진해 한꺼번에 평가받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

●‘인지 부조화론’과 ‘원한의 체계’

미국 출신의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어는 1950년대 후반 흥미 있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피험자들에게 매우 단순하고 지루한 일을 약 1시간 동안 시킨 뒤, 어떤 피험자들에게는 그 대가로 20달러를 주고 어떤 피험자들에게는 1달러를 주었다. 그리고 그 일이 실제로 얼마나 재미있었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20달러를 받은 피험자들보다 1달러를 받은 피험자들이 더 재미있었다고 응답했다.

페스팅어씨에 따르면 1달러를 받은 피험자들은 그 대가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지루한 일을 1시간이나 했다’라는 인지와 ‘나는 매우 적은 대가를 받았다’라는 인지간의 부조화를 피하기 위해 ‘그 일은 재미있었다’라는 쪽으로 자기합리화를 했다는 것이다. 페스팅어씨의 유명한 ‘인지 부조화론(Cognitive Dissonance Theory)’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사실만 선별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강화하게 되고, 이런 인지적 부조화의 입장들이 마주칠 때 사실을 무시하고 극한까지 자기 입장을 밀고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성형 연구위원은 “이런 인지 부조화는 공론의 장에서 대화를 통해 함께 극복돼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정보공개를 전제로 한 토론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인식이 굳어져 대화 자체를 거부하며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해주는 사실들만 바라보려 할 때 1940년대 이후의 아르헨티나처럼 ‘원한의 체계’가 사회에 뿌리 내리게 된다는 것.

이 연구위원은 “탄핵 정국을 계기로 극한대립으로 치닫고 있는 현재 한국사회의 분열이 바로 이런 위험을 안고 있다”고 지적한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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