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문열씨는 본보 1일자부터 주간 연재에서 일일 연재로 바뀐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의 향후 이야기 전개를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 소설이 개성이 확연히 다른 두 영웅의 투쟁과정일 뿐 아니라 한(漢) 제국의 성립을 향한 통합과정이기도 하다”며 “갖가지 이유로 갈려 있는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점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소설의 두 주인공 유방과 항우에 고르게 힘을 기울여 캐릭터를 만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유방은 ‘삼국지’의 유비의 조상이면서, 그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비와 다른 점이 있다면 무조건 인의(仁義)를 베풀기보다 싫은 사람에겐 싫다고 내색하면서도 천하통일의 대의를 위해서라면 기용하는 스타일이라는 거죠. 항우의 경우 부하가 아프면 밥 못 먹고, 잠 못 이룰 만큼 내리사랑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일단 적을 맞이하면 수십만 명도 산 채로 매장시켜버릴 정도로 극단적 적대감을 발휘하지요.”
중국인들은 신화 속의 인물인 황제(黃帝)와 치우(蚩尤)를 인간성의 두 전형으로 삼고 있다. 이씨는 유방은 인덕(仁德)의 인물인 황제가 잘 속화(俗化)된 경우이며, 항우는 군사적 인간인 치우가 잘 순화(純化)된 캐릭터라고 설명했다.
이씨는 “이번 소설은 ‘한서(漢書)’, ‘사기(史記)’,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의 중국 고서들을 바탕으로 한(漢) 제국 성립기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것”이라며 “힘든 만큼 투지도 생긴다”고 털어놨다.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 당선으로 등단해 데뷔 25주년을 맞은 올해 그에게는 이런저런 기념행사들이 잇따른다. 5월에는 ‘오늘의 작가상’(1979년)을 안겨준 ‘사람의 아들’의 하드커버 판이 출간된다. 그는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으로서의 한시적 외도는 이제 끝났다”며 “새로운 의욕으로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의 장대한 국면들을 펼쳐 보이겠다”고 밝혔다.
권기태기자 kkt@donga.com
■‘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 지금까지 줄거리
진시황이 죽은 후 난정(亂政)이 이어지자 먼저 군사를 일으켜 진 제국을 흔들어 놓은 것은 농민 진승과 오광이었다. 그들은 변방으로 강제이주 당하는 유민들을 선동하여 진나라에 반기를 들더니, 두 달도 안돼 관동(關東)을 휩쓸고 진(陳)땅에서 ‘장초(張楚)’라는 나라까지 세우게 된다.
진승과 오광의 봉기에 호응하여 오중(吳中)에서도 항량과 항우가 군사를 일으킨다. 그들은 초나라 사람들이 가장 애틋하게 기억하는 명장 항연(項燕)의 아들과 손자인데, 회계 태수 은통(殷通)을 죽이고 그 일대를 장악한다. 그리고 그 지역 호걸들의 지지 아래 만만치 않은 세력을 키워간다.
이때 패현(沛縣)에서는 유계라는 저자거리 건달이 현령을 내쫓고 패공(沛公)이 되면서 유방이라 이름 한다. 그는 죄를 짓고 평소 어울려 다니던 건달패거리와 망탕산에 숨어 지내다가 고을 사람들의 부름을 받고 패현으로 돌아가 현령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그러나 항량 과 항우에 비해 세력이 보잘 것 없었다.
진승과 오광은 멍석 말듯 관동을 휩쓸며, 옛 육국(六國)을 차례로 부활시켰으나 오래잖아 진나라가 보낸 토벌군에게 죽고 장초도 망하고 만다. 그런데 소평이라는 건달 하나가 항량을 찾아와 엉뚱하게도 진승의 명을 사칭하여 출병을 명령한다. 항량은 항우와 더불어 강동의 자제 8000명을 핵심으로 삼는 유민군 2만명을 이끌고 회수를 건넌다.
이때 유방도 이웃 군현을 휩쓸며 세력 확장을 꾀했으나 결과는 신통치 못했다. 몇 군데 현을 공략하기는 했으나 기뻐하기도 잠시, 근거지가 되는 풍읍(豊邑)은 데리고 있던 건달 옹치(雍齒)의 배반으로 잃고 만다. 유방은 힘을 다해 풍읍을 공격해보았지만 제 힘으로는 되찾을 수가 없었다.
이에 유방은 한창 기세 좋게 뻗어 나오는 항량을 찾아가 군사를 빌리려 한다. 항량은 유방을 좋게 보아 적지 않은 장졸을 빌려주고 풍읍을 되찾게 해준다. 그 과정에서 유방와 항우의 역사적인 만남이 있게 된다. 그들은 항량의 권유로 형제의 의를 맺고 한때는 한 덩어리가 되어 싸움에 나가기도 한다.
한편 세력이 커진 항량은 옛 초나라 왕실의 핏줄을 찾아 회왕(懷王)으로 옹립하고 초나라를 재건한다. 그러나 교만과 방심으로 정도(定陶) 싸움에서 진나라 장수 장함에게 져서 죽고 만다. 홀로 남은 항우는 송의(宋義)라는 옛 초나라 고관 출신의 농간으로 잠시 궁지에 몰리지만 곧 송의를 죽이고 스스로 상장군이 되어 실권을 되찾는다.
군사 5만을 이끌고 조나라로 간 항우는 진나라의 장수 왕리와 소각, 섭간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그들이 이끌던 20만 대군을 쳐부수어 몇 달째 포위되어 있던 거록성을 구해냈다. 그러자 항우의 위엄은 천하를 진동시키고 제후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하게 됐다. 거기다가 진나라 장수 장함의 항복까지 받아내자 항우는 드디어 모든 제후들의 우두머리가 됐다.
하지만 그때 유방이 이끄는 한 갈래 군사는 무관(武關)을 통해 관중(關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적장을 뇌물로 매수하고 속여 요관(嶢關)까지 쉽게 빼앗은 유방은 곧장 남전(藍田)으로 군사를 몰았다. 남전 골짜기를 지나면 패상(覇上)이요, 패상에서 진나라 수도인 함양은 보졸(步卒)이 걸어서도 하룻길밖에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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