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에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명작 ‘옷 벗은 마야’가 걸려 있다. 이 그림은 고야가 어느 집시 여인을 모델로 그렸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200년 후 그 마야와 똑같은 얼굴을 한 플라멩코 무용수 안나가 나타난다. 어떻게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장난을 자연이 해냈단 말인가? 혹시 이 우주 안에는 하나의 현실, 하나의 시간, 하나의 우주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
“묵직한 주제를 깃털처럼 가볍게 다룰 줄 아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다”는 평을 듣고 있는 요슈타인 가아더. 1991년 발표한 ‘소피의 세계’가 45개국에서 번역돼 일약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그는 이 책에서 현대 진화생물학의 논점을 소설 형식에 담아 흥미롭게 풀어낸다.
철학교사 출신인 저자는 진화생물학뿐 아니라 천문학 물리학 문화인류학 미술사 등 여러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대화로 독자의 뇌세포를 끊임없이 자극한다. 영화처럼 탄탄한 긴장을 갖춘 이야기 얼개는 퍼즐게임 같은 추리소설이자 진실한 사랑을 찾는 세 커플의 감동적 연애소설로도 읽힌다.
소설의 무대는 날짜 변경선이 지나는 섬인 남태평양의 타베우니. 2000년 카운트다운을 앞두고 새 천년을 가장 먼저 맞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이 섬에 모여든 다양한 사람들은 스페인의 집시 커플 안나와 호세를 만나면서 거미줄 같은 수수께끼에 얽혀든다. 어떻게 20세기의 여자가 200년 전 그림의 모델과 얼굴 생김새가 똑같을 수 있는지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주요 모티브다. 마치 ‘날짜 변경선’ 위에 서면 한 발은 오늘에, 한 발은 어제에 서 있듯이 소설 속 시간은 역류하기도 하고 원인과 결과가 뒤섞이기도 한다.
“인간을 창조하는 데는 수십억년이 걸렸다. 그러나 죽는 데는 겨우 몇 초가 걸릴 뿐이다.”
원시적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섬에서 등장인물들은 생물의 진화가 단순히 우연의 연속인지, 목적의식적인 창조였는지 날카로운 논쟁을 벌인다. 지적인 영장류로서 그들의 대화의 상상력은 ‘아방가르드 양서류’부터 ‘150억년 빅뱅’까지 엄청난 시공간을 떠돈다.
“인간은 기껏해야 80∼90년 정도 살 수 있는 복잡한 생화학적 구조를 갖고 있어. 하나의 인간은 유전자가 살아남기 위한 기계에 불과해. 삶의 근본적인 목적은 인간 개개인의 신체가 아니라 대대로 이어져야 하는 유전자의 생존이지. 달걀의 목적은 닭이 아니야. 닭은 그저 달걀의 산물일 뿐이야.”(생물학자 프랑크)
그러나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과 대화는 별거 중인 노르웨이의 진화생물학자 프랑크와 베라 커플이 사랑을 되찾기 위한 장치로 귀결된다. 베라는 프랑크의 아기를 임신한 후 “나한테는 오직 한 남자와 하나의 지구가 있을 뿐이야”라고 뜨겁게 사랑을 고백한다. 평범한 듯해 보이는 이런 사랑이 결국 자신의 유전자를 세상에 남기고 진화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임을 알려주는 메시지인 셈이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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