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체로 ‘권장도서 목록’이 될 만큼 잘 꾸려진 전집류는 교육적으로 유용하다. 책을 고르는 교사의 수고를 덜어줄뿐더러, 같은 시리즈라는 이유로 다른 책까지 읽게 하는 ‘독서 전염’ 효과까지 있다. 전집이라는 큰 부피로 시선을 붙잡는 ‘물량의 위력’도 무시할 수 없겠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좋은 전집이 많이 나왔다. 그중에서도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은 목록의 폭과 깊이, 내용과 편집의 질에 있어서 추천할 만한 수작(秀作)이다.
오늘 소개할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중 한 권이다. 이 소설은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패러디한 것으로, 방드르디(Vendredi)란 원주민 소년 프라이데이(Friday)를 프랑스어로 부른 것이다.
동화 속의 로빈슨 크루소는 불모의 땅을 홀로 개척하는 영웅이고 프라이데이는 계몽시켜야 할 미개인이다. 그러나 ‘방드르디’에서 이 둘의 관계는 완전히 역전된다. 소년에게 무인도는 ‘문명’이 없어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땅이다. 자연이 주는 것을 먹고 졸릴 때 자며 섬의 아름다움을 그 자체로 만끽하는 것, 그 외에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그러나 로빈슨에게 자연은 정복 대상이다. 그는 문명 생활을 재건하려는 노력 속에서 스스로를 괴로움에 빠뜨릴 뿐이다. 서구 중심의 세계관이 지닌 오류의 뿌리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방드르디’에서 로빈슨은 프라이데이를 문명화시키려고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오히려 프라이데이에 의해 로빈슨이 ‘야만화’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그것은 퇴보가 아니라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다.
이 책은 독자의 수준에 따라 로빈슨 크루소를 비틀어 놓은 재밌는 이야기로도, 심오한 철학적 우화로도 읽힐 수 있다. 다양한 층위의 해석이 가능한 텍스트는 독서 토론을 위한 좋은 교재이다. 집단을 이루어 함께 읽는다면 사실의 습득에서 추상적 가치판단에 이르기까지 사유의 여정을 함께 꾸려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독서토론은 ‘전집’ 내 다른 작품으로도 자연스레 옮겨갈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좋은 책도 여럿 모이면 시너지 효과를 낸다. 이 점에서 좋은 전집들의 출현은 책 권하는 교사에게 희망과 기대를 갖게 한다.
안 광 복 중동고 철학교사·학교도서관 총괄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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