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잣대를 장르의 다양화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 의미는 확실해진다. 한국 영화는 할리우드와 비교할 때 코미디와 멜로에서는 경쟁력이 있다는 것이 충무로의 주장이었다. 거꾸로 이 말은 나머지 장르에서는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의미한다.
15일 개봉된 이 작품은 과감하게 한국 영화로서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범죄 스릴러에 도전했고, ‘거의’ 완벽에 가까운 성공을 거뒀다. ‘살인의 추억’이 연쇄살인사건을 중심으로 70, 80년대 부조리한 사회상을 밑그림으로 보여줬다면 ‘범죄…’는 할리우드식 오락 영화의 접근법을 선택했다.
영화는 결말을 먼저 보여준다. 한국은행에서 50억원을 빼낸 용의자의 차량이 경찰에 쫓기던 중 뒤집혀 폭발한다. 현장에 남은 것은 없다.
이 작품은 돈도 용의자도 사라진, 이 지점에서 희대의 사기극을 재구성한다. 사기 전과로 출소한 최창혁(박신양)은 은행을 털 계획을 세운 뒤 ‘사기꾼의 대부’로 불리는 김 선생(백윤식)을 찾아간다. 떠버리 얼매(이문식), 제비 김철수(박원상), 위조 기술자 휘발유(김상호)가 사기극의 주요 ‘배우’로 참여한다. 사기극은 착착 진행되고 이들은 50억원을 들고 유유히 은행 문을 나선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의문의 여인이 제보전화를 한 탓에 경찰의 추적이 시작된다. 얼매는 뒷문으로 도망가다 자동차에 치여 붙잡히고, 50억원을 싣고 달아나던 최창혁은 사고로 죽는다.
차반장(천호진)은 50억원과 사라진 김 선생 일당을 찾기 위해 얼매, 창혁의 형 창호, 김 선생의 동거녀로 ‘구로동 샤론 스톤’으로 불리는 서인경(염정아)을 상대로 수사를 벌인다.
영화는 현재와 과거 시점을 교차시키며 5명의 사기꾼과 서인경 사이에 얽힌 과거사와 욕망, 배신, 갈등의 파노라마를 보여주며 관객과의 두뇌게임을 유도한다.
두뇌게임의 맞수는 경찰이 아니다. 경찰은 이 사기극에 대한 정보를 주고 약간의 긴장감을 유발하는 다리 역할을 맡고 있다. 관객이 뻔하게 파악한 사건의 전모를 끝까지 모르는 ‘미련한 경찰’으로 남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의 재미는 3년 동안 경마장과 전국 방방곡곡의 도박판을 찾아다니며 취재한 내용이 담긴 최동훈 감독의 생생한 시나리오와 주연 조연을 가릴 것 없이 톱니바퀴처럼 이가 잘 맞는 6명 배우의 ‘팀 플레이’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영리한’ 감독이 계산에 넣지 못한 것은 ‘캐릭터의 진화’다. 영화는 박신양에게 1인2역을 맡기면서 그의 복수를 작품의 한 테마로 깔았지만 관객들과의 감정적 동화는 이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뻔뻔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매력적인 캐릭터의 김 선생이 어느새 주인공이 돼 버린다. 미련한 경찰에 의해 ‘천하의 김 선생’이 죽어야 하는 한국적인 결말이 노출되는 순간 관객은 허탈감에 빠진다.
두뇌 게임이 영화의 초점이었다면 박신양의 1인2역 설정은 너무 뻔한 ‘힌트’였고, 잘 빠진 할리우드 영화가 목표였다면 한국적인 결말이 좀 아쉽다. 그래서 이 영화는 만만치 않은 웃음과 긴장을 주면서도 막상 관객들은 클라이막스를 경험하지 못하는 희한한 경험을 준다. 18세 이상 관람가.
김갑식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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