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의 아들인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비극적인 사랑이야기가 후대인들에게 회자되면서 초기 고구려를 이해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소개되고 있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는 ‘삼국사기(三國史記)’ 대무신왕 조에 기록되어 있다.
● ‘삼국사기’에 함께 언급된 낙랑국-낙랑군
“호동왕자는 대무신왕의 아들로서 뛰어난 인물이었는데 옥저 근처로 사냥을 갔다가 낙랑왕 최리를 만났다. 최리는 한눈에 호동의 뛰어난 기상을 파악하고 북국(고구려)의 왕자임에 틀림없다고 하며 호감을 갖고 자기 딸인 낙랑공주와 결혼하도록 했다. 그 후 호동은 고구려의 낙랑 정벌 때 낙랑공주로 하여금 나라가 위태로울 때 ‘스스로 울리는 북과 뿔피리’(自鳴鼓角)를 파괴토록 해 승리했지만 낙랑공주는 낙랑왕에게 처형당하였다. 한편, 호동도 후에 계모의 모함을 받아 자살했다.”
이 이야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낙랑이 나라로 표현되어 있고 낙랑왕 최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위만조선을 장악하고 설치한 낙랑군과는 다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 ‘삼국사기’는 낙랑이 멸망했다는 기사(37년)와 다르게 그 후에도 낙랑은 지속되다가 313년 미천왕에 의해 멸망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낙랑공주의 모국 낙랑은 한(漢) 군현의 낙랑군이 아닌 고구려 주변의 다른 나라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고구려가 초기에 여러 소국들을 병합 팽창해가는 과정을 표현한 기사로 파악되고 있다. 이 같은 사료상의 문제 때문에 우리 학계에서는 ‘삼국사기’와 중국 기록인 ‘후한서(後漢書)’ 등에 달리 나타나는 낙랑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해 입장이 크게 세 가지로 나뉘고 있다.
첫째, ‘삼국사기’의 기록을 무시하고 한이 설치한 낙랑군의 중국 식민지적 성격을 부각시키는 입장이다. 이는 종래 일본학자들이 주로 내세운 학설로 낙랑군이 주변 민족의 독자적 발전을 저해했다기보다는 고도로 발달한 중국문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한 창구로 ‘문명화’의 공로가 있다는 입장이다. 이는 식민지배 체제가 근대화를 가능케 했다는 ‘일제식민지 근대화론’과 닮았다.
둘째, 낙랑국과 낙랑군을 별개의 존재로 설정한 신채호 선생 이래의 학설이다. 이는 한(漢)이 침공하기 이전부터 임둔, 진번, 현도가 위만 조선의 주변 소국으로 존재했다가 한의 군현이 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하고 있다. 특히 고구려와는 별도로 고구려현이 현도군 속현으로 존재한 사실에 견주어 낙랑국과 낙랑군이 별도로 존재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즉, 한(漢)나라는 위만조선의 상층부가 분열해 붕괴하자 친(親)중국 세력인 낙랑국을 중심으로 군현을 만들어 낙랑국의 낙랑왕을 계속 두고, 별도로 중국의 군 태수가 설치된 이중적 통치구조를 유지했다는 입장이다. 이들의 영역은 중첩됐고 중심 위치는 인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학계는 여기서 더 나아가 낙랑군은 랴오둥(遼東)의 카이펑(開平) 일대에, 낙랑국은 현재의 평양 일대에 존재했다고 본다.
셋째, 낙랑이란 표현이 낙랑군과 이에 예속된 존재들에 대한 포괄적 명칭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란 학설도 있다. 즉,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는 ‘낙랑’이란 표현이 신라, 백제에도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시기와 거리상 낙랑에 포섭됐던 말갈이나 옥저, 동예 등과 같은 예속세력을 ‘낙랑의 세력’이란 의미로 ‘낙랑’이라 표현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인식이다.
● 낙랑은 평양 쪽에 아니면 함흥 쪽에?
현재 우리 학계에서는 낙랑공주의 모국인 낙랑을 낙랑국 또는 낙랑에 예속됐던 주변 소국으로 이해한다. 즉, 친중국적 낙랑국을 다스린 최리 정권이 호동왕자 사건으로 결정적 타격을 입어(서기 32년) 고구려에 복속됐고(서기 37년),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급속히 쇠퇴하자 ‘삼국사기’ 기록처럼 후한 광무제가 바다를 건너 낙랑을 다시 장악하고 후한시대의 낙랑군 체제를 수립해 살수(薩水·청천강) 이남 지역을 장악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 이때 재정비된 낙랑군이 후에 미천왕에 의해 다시 복속된다(서기 313년). 이 경우 낙랑은 평양과 인접한 지역이 된다.
한편 옥저로 사냥을 나갔다가 낙랑왕을 만났다는 점과 고구려 태조왕 4년(57년)에 옥저가 고구려에 복속된다는 기사를 감안해 이 낙랑을 옥저 지역의 낙랑 예속 소국으로 보기도 한다. 옥저는 사료에는 부조(夫租)로도 나타나는 데 위치는 현재 북한의 함흥 또는 동해안 인접지역으로 상정된다.
현재 학계의 두 입장은 결국 낙랑국과 낙랑군이 따로 존재했고 먼저 고구려에 의해 낙랑국이 복속된 다음 나중에 낙랑군이 복속된 것으로 정리된다. 따라서 낙랑은 중국과 문화교류의 창구 역할을 했던 친중국적 세력으로 파악되며 특히, 그 속성상 고구려 발전을 위해 소멸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조법종 우석대 사학과 교수
▼낙랑공주가 찢은 자명고는?▼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사랑 이야기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자명고’다. 이는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북이 스스로 울려 위험을 알려주는 비상경보시스템이다. 사료에는 자명고각(自鳴鼓角)으로 나와 있어 정확히는 ‘북과 뿔피리’다. 종래에는 이를 비현실적 설화로 보는 입장이 많았다.
또는 이것이 무기창고에 있었고 중국이 예속세력에게 고취기악인(鼓吹伎樂人)을 파견했다는 점에 주목해 중국의 정치, 군사적 후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북은 고대사회에서 신에게 제사지내는 데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 부여의 ‘영고(迎鼓)’라는 제천의례는 ‘북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북이 하늘의 신과 동격으로 인식됐음을 보여준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에는 비류국의 국가위엄을 상징하는 의기(儀器)로 북이 등장한다. 주몽이 이를 몰래 훔쳐 자신의 북인 것처럼 자랑하는 사건에서 보듯이 북은 국가적 위엄과 관계가 있었다. 낙랑의 자명고도 하늘에 제사지내는 의식용 북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나라의 위험을 감지한 신관(神官)들이 이를 통해 경계했을 것으로 파악된다.
고구려 수산리 벽화에 나타난 해 모양의 북도 북이 하늘의 소리를 전해주는 종교적 신성물이었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따라서 자명고는 낙랑국이 우리 민족문화권에 속했음을 알려준다.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