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투탕카멘의…’ 집념으로 발굴한 ‘이단의 파라오’

  • 입력 2004년 4월 23일 17시 24분


◇투탕카멘의 무덤/하워드 카터 지음 김훈 옮김/524쪽 1만5000원 해냄

투탕카멘은 20세기 고고학계의 주술과도 같은 이름이다. 그는 3000여년 전 이집트 고대문명의 안내자인 동시에 ‘미라의 저주’로 통칭되는 대중적 신화의 주인공이다. 특히 이집트문명과의 직접적 접촉이 어려운 한국에서 그 이름은 후자에 더 가깝다.

이 책은 투탕카멘의 진실에 가장 가까운 책이다. 1922년 ‘금단의 문’을 열고 들어가 기원전 1323년 19세의 나이로 숨진 파라오를 불러낸 주역의 생생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저자 하워드 카터(1874∼1939)는 영국의 가난한 삽화가 집안에서 태어나 16세 때 무덤 벽화 모사(模寫)를 위해 이집트로 보내진다.

정규 교육과정 없이 순전히 현장에서 고고학 지식을 터득한 그가 ‘왕들의 골짜기’에서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한 것은 집념어린 추적의 결과였다.

고대 이집트의 수도 테베에 위치한 ‘왕들의 골짜기’는 이집트 신왕국(기원전 1540∼기원전 1070년)을 500년간 다스린 18∼20왕조 파라오들의 무덤이 모인 곳이다. 1815년 이탈리아 사업가 벨초니가 처음 발굴한 이래 수십여 기의 묘들이 발굴된다.

그러나 모두 텅 비어있었다. 도굴꾼들의 금은보화에 대한 집착이 현세의 영광을 내세로 연결하려한 파라오의 욕망을 능가했기 때문이다. 파라오 묘에 대한 도굴의 역사를 읽노라면 파라오의 무덤은 일종의 부의 재분배 기능을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미라가 남아있던 묘도 한꺼번에 13구의 미라가 발견된 아멘호텝 2세의 것뿐이었다.

이 때문에 카터가 영국의 귀족 카나번 백작의 후원을 받아 투탕카멘의 묘를 본격적으로 찾아 나선 1914년에는 더 이상 발굴될 무덤이 없었다는 게 이집트 고고학계의 정설이었다. 그러나 카터는 그들 무덤 중에 소년왕 투탕카멘의 것이 빠져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비전공자인 하워드 카터가 1922년 투탕카멘 묘를 발굴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가져다 준 행운이 아니라 치밀한 추리와 계획에 따라 착수 후 8년간을 끈기있게 추적한 결과였다. 투탕카멘의 묘에서 발굴된, 태양과 달이 상감 장식된 가슴 장식물(작은 사진 왼쪽) 등 장신구.사진제공 해냄

투탕카멘은 다신교 사회였던 이집트에 유일신 신앙을 도입한, 그래서 후대에도 ‘이단의 파라오’로 불리게 된 아케나텐의 후계자인데다 요절한 탓에 철저히 잊혀진 파라오였다.

카터는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아케나텐의 묘와 메렌프타의 묘, 그리고 람세스 6세의 묘의 삼각지대에 투탕카멘의 묘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1차 세계대전 발발 등 갖가지 난관에 부닥쳐 8년을 끌던 발굴작업의 마지막 시도에서 마침내 카터는 람세스 6세의 묘 입구로부터 4m 아래에 놓인 투탕카멘 묘를 찾아낸다. ‘왕들의 골짜기’에서 가장 낮은 지대에 위치한 묘였지만 무려 3400여점의 화려한 유물을 고스란히 간직한 최초의 무덤이었다.

이 책에는 3000여년의 숨결을 간직한 이집트 예술품의 생생한 사진은 물론 이를 처음 보고 놀라는 카터의 사진도 함께 들어 있다. 이후 카터의 여생은 이 소년 파라오에 바쳐진다. 그러나 그것은 저주받아서가 아니라 매혹됐기 때문이었다. 그는 10년에 걸쳐 유물을 정리, 기록, 복원했고 그 과정을 3권의 책에 담아낸 뒤 이를 다시 한 권으로 요약했다.

국내 최초로 번역된 이 책은 ‘미라의 저주’에 대한 묵은 오해를 불식시킬 해독제이기도 하다. 원제 ‘The Tomb of Tutankhamen’.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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