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39>卷三. 覇王의 길

  • 입력 2004년 4월 29일 19시 02분


석 줄만 남은 法 ⑨

“여기 이 아이들은 여섯 달 전 조(趙) 승상의 명으로 이세 황제를 위해 전국 각처에서 골라 뽑아온 미녀들입니다. 저희들이 맡아 가르치고 있는데, 갑자기 이세 황제께서 돌아가시고, 조 승상도 죽어 지금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그냥 데리고 있습니다. 자영(子영) 공자께서 진왕(秦王)에 오르셨으나 이 일에 관해서는 달리 하명(下命)이 없었던 데다, 이제 다시 초나라에 항복을 하셨다니 저희들은 더욱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저 하루 빨리 천하의 새 주인께서 이곳에 이르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늙은 궁녀의 그 같은 말에 패공 유방의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고는 있어도 아직은 다분히 추상적인 야망이 문득 실감으로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내가 바로 그 새 주인이고 싶다. 새 주인이 되어 너희 모두를 거둬들이고 싶다. 그 옛날 한낱 역도(役徒)에 지나지 않았던 내가 시황제의 행차를 보고 감히 부러워하며 얻고자 했던 것들 중에는 틀림없이 이것들도 들어있었다….)

그러면서 한 번 더 젊은 궁녀들을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을 걷고 나타난 달처럼 환하면서도 처연한 자태로 패공의 눈길을 끄는 소녀가 있었다. 열 예닐곱이나 되었을까, 이제 막 피어나는 얼굴은 그대로 한 떨기 이슬을 머금은 부용(芙蓉)꽃 같았다. 여윈 듯하면서도 호리호리한 그 자태처럼이나 너무 아름다워 오히려 쓸쓸하고 슬퍼 보이는 얼굴이었다.

“저 아이는 누구냐? 어디서 왔으며 지금 무얼 하느냐?”

패공이 까닭 모르게 가빠오는 숨결을 억지로 고르며 다시 늙은 궁녀에게 물었다. 늙은 궁녀가 패공이 턱짓하는 쪽을 흘깃 보고는 말했다.

“음릉(陰陵) 땅 우자기(虞子期)의 딸입니다. 우희(虞姬)로 부르는데,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아직은 궁궐의 예법과 아울러 시문(詩文) 가무(歌舞)를 익히고 있습니다.”

“으흠, 곱구나. 이세 황제가 살아서 너를 보지 못한 게 다행이로구나.”

패공이 불쑥 그렇게 말해 놓고 보니 너무 속을 드러내 보인 것 같아 겸연쩍었다. 얼른 말투를 엄숙하게 바꾸어 모두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가 왔으니 모두 걱정 말거라. 내 관중왕(關中王)이 되어 이 함양을 물려받으면 너희를 잘 보살펴 주리라”

그리고 방을 나오기 바쁘게 번쾌에게 말했다.

“현성군(賢成君)은 전각 한 채를 비우게 하여 내가 묵을 곳을 마련케 하라. 이제부터 나는 이 궁궐에 묵을 것이다.”

“형님 그 무슨 말씀이슈? 형님이 어찌하여 진나라 궁궐을 차지하신단 말이오?”

놀란 번쾌가 평소에는 깍듯이 차리던 상하의 예절도 잊고 옛날 건달 시절처럼 소리쳤다. 그러나 패공은 무엇에 씐 사람처럼 제 흥에 겨워 호기롭게 말했다.

“장군은 잊었소? 회왕께서는 먼저 관중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관중왕으로 삼기로 여럿 앞에서 약조하셨소. 나는 가장 먼저 관중으로 들어왔을 뿐더러, 진왕 자영으로부터 항복까지 받아냈소. 그런데 내가 관중왕이 못되면 누가 된단 말이오. 그러면 마땅히 내가 차지하게 될 이 궁궐에 며칠 미리 묵는다 하여 아니 될 게 무엇이란 말이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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