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카페][책의향기]‘궁궐의 꽃 궁녀’ 펴낸 신명호 교수

  • 입력 2004년 4월 30일 17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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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녀는 천민에서 왕비로 신분 상승을 꿈꿀 수 있는 ‘신데렐라’만이 아니었습니다. 여성 직업 중에는 최고의 고소득 전문직이었습니다.”

드라마 ‘대장금’으로 친숙해진 궁녀의 삶은 그전까지만 해도 동정의 대상이었다. 평생 한번 올까 말까한 임금의 은총을 그리며 음지에서 시드는 꽃처럼 여겨졌다.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39)가 쓴 ‘궁궐의 꽃 궁녀’(시공사)는 조선조 궁녀의 삶을 실증적으로 조명한 책이다. 종래 궁녀에 관한 책으로는 이규태의 ‘개화백경’과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연구’가 손꼽힌다.

“그 책들은 구한말 궁녀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쓰이다 보니 망국의 비극적 정조가 겹쳐져 궁녀를 가련한 존재로 인식시킨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증언을 다른 사서들과 비교해가며 검증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대부분의 사서에서 궁녀는 그림자만 비칠 뿐 실체가 언급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역모사건을 모은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이 돌파구였다.

“웬만한 역모사건에는 내시와 궁녀가 빠지는 법이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사건에 연루된 궁녀의 이름만 등장하지만 일종의 법정기록인 추안급국안에는 그들의 나이, 출신, 업무 등이 자세히 소개돼 있어 비교검증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조선시대 궁녀는 건국 초 200여명이었지만 후대로 가면서 600∼700명으로 늘었다. 고종 때 구조조정을 단행해 500명으로 줄였으나 왕에 100명, 왕비 100명, 대비 100명, 세자 60명, 세자빈에 40명이 배치됐다.

“궁녀는 궁궐 내수사 산하 5만∼10만명에 이르렀던 공노비 중에서 선발됐습니다. ‘대장금’에서와 달리 양민출신은 극히 드물고 세습한 경우도 찾기 어려워요.”

같은 천민출신이지만 왕실의 시중을 드는 상궁, 나인과 다시 그들의 시중을 드는 방자와 취반비, 무수리 등으로 나뉘었다. 물론 왕의 눈에만 든다면 상황은 언제든 역전이 가능했지만. 궁녀는 그런 ‘성은(聖恩)’을 빼고는 철저히 성욕을 억제해야 했다. 궁녀의 간통은 모반죄로 취급돼 처형됐다. 모시던 왕실 주인이 죽어 퇴궐해도 혼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급여수준은 매우 높았다. 궁녀 중에서 가장 높은 제조상궁은 5품에 불과하지만 정3품 이상 당상관보다 더 많은 녹봉을 받았다. 하루 근무하고 하루 쉬는 격일제 근무여건도 당시 천민들에겐 꿈같은 일이었다.

“궁녀를 비극적 존재로 볼 것이 아니라 왕실문화의 적극적 주체로 재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음식, 복식, 육아 등 궁중문화의 꽃을 피운 것은 바로 그들이었으니까요.”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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