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2/이덕일 지음/1권 278쪽 2권 310쪽 각권 1만2900원 김영사
“사람이 지기(知己)가 없다면 이미 죽은 지 오래인 것이다. 처가 나를 알아주지 않고, 자식이 알아주지 않고, 형제나 집안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데 나를 알아주는 분은 세상을 떠났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경집(經集) 240권을 새로 장정해 두었는데, 장차 그것들을 불사르지 않을 수 없겠구나.”
1816년 6월 6일,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 유배 가 있던 둘째형 약전(若銓)이 그곳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정약용(丁若鏞)은 그 슬픈 심정을 이렇게 적었다. 정신적 학문적으로 가장 의지했던 둘째형의 사망 소식을 약용은 자신의 유배지인 전남 강진에서 들어야 했다.
정조가 사망한 직후인 1801년 신유사옥으로 약용과 약전이 유배지로 떠날 때 약용의 셋째형 약종(若鍾)은 끝까지 천주교 배교를 거부해 장남 철상과 함께 처형 당했다.
그 뒤 1839년 기해사옥 때는 약종의 셋째 부인 유씨와 둘째아들 하상, 딸 정혜까지 사형을 당했다.
이복 맏형인 약현(若鉉)은 천주교도로 핍박을 받지는 않았지만 ‘황사영백서’의 주인공인 황사영이 그의 사위였다.
황사영은 사형을 당했고 약현의 딸과 손자는 관노가 되어 섬으로 유배됐다.
또한 조선인 최초로 영세를 받은 이승훈은 약용의 매형이었고 조선 천주교회를 창립한 이벽은 큰형 약현의 처남이었다.
이들에게 적용된 죄명은 모두 사교(邪敎)인 천주교를 믿었다는 것이었지만 사실 이들은 쇠락해 가는 조선사회를 바라보며 새로운 사상을 통해 돌파구를 찾음으로써 새 시대를 열어 보려 했다.
한국역사의 대중화에 앞장서 온 저자는 정조 때 시대의 변화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조선사회의 개혁을 꿈꿔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약용 형제를 중심으로 펼쳐 나갔다.
이 책은 저자가 발표해 온 조선후기 인물사 3부작의 완결편이다.
1부 ‘송시열과 그의 나라’, 2부 ‘사도세자의 고백’을 거쳐 이번 3부에서는 주자학 일색의 이데올로기와 노론의 폐쇄적 체제에 맞서 새로운 사회를 지향했던 정조와 정약용, 그리고 그의 형제의 삶을 그렸다.
이들은 결국 닫힌 사회를 열지 못하고 사형 당하거나 유배지로 갔지만 이들이 남긴 삶의 족적은 우리 역사의 의미 있는 자산이 되어 전해진다.
약종이 지은 ‘주교요지(主敎要旨)’는 조선 천주교인이 쓴 최초의 교리서로 당시 조선 천주교인들의 인식 수준과 신앙 수준을 알려주는 역사적 자료가 됐고 약전이 흑산도에서 지은 ‘자산어보(玆山魚譜)’는 유배생활 중 흑산도 근해의 수산생물을 실지로 조사 채집한 기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학 연구서다.
그리고 ‘경세유표’와 ‘목민심서’를 비롯해 약용이 지은 약 500권의 저술은 동양의 오랜 전통을 바탕으로 조선사회의 개혁 방향을 앞서 제시해 주고 있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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