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그저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까지 시장에서 장사하다가 들어온 것밖에 없어요. 이 상을 큰아들 경읍이에게 돌리고 싶습니다.”
25년간 서울 동작구 흑석동 시장에서 억척스레 생선 장사를 하면서 4남1녀를 키워낸 어머니 박씨는 맏아들에게 모든 공을 돌렸다. 경읍씨는 어린 동생들을 포대기에 업고 키우며 집안에서 아버지 역할을 대신했다. 2002년 12월 작고한 아버지는 생전 전국의 산천을 돌면서 시와 그림을 벗하며 평생 ‘풍운아’처럼 살았고, 집안은 거의 돌보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경읍씨가 아버지와 함께 산 기억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5년에 불과하다. 셋째아들 경주씨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아버지의 부재(不在) 탓일까. 경주씨는 이유 없는 반항과 싸움으로 늘 말썽을 피웠다. 그때마다 여섯 살 위의 형 경읍씨는 어머니 대신 학교를 찾아가 선생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어머니는 남편 없이 사는 고단한 삶에 자식마저 속을 썩이자 큰아들을 붙잡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경주씨는 “사춘기 때는 솔직히 어머니의 ‘생선 비린내’가 부끄러워 친구들을 집에도 못 데려왔고, 그게 이유 없는 반항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그는 “배우가 된 다음에야 ‘사는 게 전투 같았던’ 어머니의 삶이 오히려 배우로서의 내 인생에 큰 힘이 됐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머니를 찾아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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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형제는 항상 첫 공연의 맨 앞좌석을 어머니를 위해 비워둔다. 어머니는 생선 장사를 하면서도 틈틈이 시간을 쪼개 아들들을 보기 위해 공연장을 찾는다. 그덕분에 경읍씨가 출연한 작품 70편, 경주씨의 출연작 30편의 대부분을 보았다.
어머니 박씨는 “제가 뮤지컬을 볼 줄은 모르지만, 아들들이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면 행복하다”며 웃었다.
어머니는 이달 달력의 29일에도 동그라미를 쳐놓았다. 경읍씨가 29일부터 7월 4일까지 열리는 창작뮤지컬 ‘터널’(서울 중구 충정로 문화일보홀)에 체육선생님으로 출연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청소년의 방황과 사랑을 그린 성장드라마로 주인공 민구는 억척스러운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18세 고교생이다.
경읍씨는 “극 중 어머니가 생선 장사를 하는 등 우리 형제 이야기랑 내용이 비슷해 감회가 남다르다”며 “인생에서 고난은 ‘기차 터널’처럼 아무리 어둡고 길게 느껴지더라도 언젠가 끝나는 것임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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