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은 우선 황금빛 찬란한 궁전과 의상으로 관객의 탄성을 자아낸다. 완벽하게 행복한 환경에서 태어난 공주의 삶에 잠시 마녀의 저주가 끼어들지만 ‘왕자의 키스’라는 너무도 낭만적 해결책을 통해 다시 완전한 행복을 회복한다. 관객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동화 속에 빠져들며 고도로 훈련된 무용수들이 완벽한 조형미를 구현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오로라 공주 역의 김주원이 네 왕자를 연속적으로 상대하기에는 균형이 좀 불안해 보이고, 데지레 왕자 역을 맡은 이원철의 독무에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점을 민감하게 잡아낸다. 물론 두 주역이 거의 완벽한 호흡으로 환상적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때는 열렬한 환호를 보낸다.
영국의 안무가 매튜 본이 뒤집은 것은 이런 고전발레의 틀이다. 공주나 왕자 같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기대해봄 직한 꿈을 보여준다. 그는 중산층 가정의 행복한 크리스마스 파티로 시작되는 원작의 배경을 단조로운 흑백 톤에 곧 무너질 듯한 고아원의 우울한 크리스마스로 바꿨다. 등장인물들은 토슈즈도 신지 않고 있다.
고아 소녀 클라라는 우울한 현실을 벗어나 섹시한 플라멩코 무용수도 되고 싶고, 복슬복슬한 분홍색으로 단장한 팬시걸도 되고 싶다. 때로는 느끼한 아저씨를 만나 확 타락해 버리고도 싶다. 마침내 순박한 클라라는 꿈속에서나마 고아원을 탈출해 사탕나라로 가지만 잘 어울릴 수 없다. 그곳 사람들은 오히려 클라라가 사랑한 ‘호두까기 소년’을 빼앗아간다. 클라라의 소망은 잠에서 깨어나 ‘호두까기 소년’ 대신 고아소년과 함께 고아원을 탈출하는 것으로 실현된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넘어서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 바로 행복의 비결’이라고 했던 스토아철학자들의 현명한 충고를 받아들일 것인가. ‘잠자는…’을 택한 관객에게도 할 말은 있다. “기왕이면 극장에서는 현실에서 아예 불가능한 꿈에 흠뻑 빠져보고 싶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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