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 안내장은 다음과 같았다.
‘1960년대 초 이탈리아 영화 속 여 주인공의 하루를 통해 스타일을 제안한다.’
무대에 불이 켜지자 머리를 둥그렇게 말아 올린 모델들이 우아한 워킹으로 등장한다. 모델의 몸을 타고 흐르는 오렌지색, 코발트 청색, 보라색, 초록색 등은 광택 나는 자카드, 새틴 소재와 어우러져 고급스러웠다.
쇼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스타 디자이너 정구호씨(41)였다. 지난해 4월 제일모직은 ‘구호’ 브랜드를 인수하며 1997년 이 브랜드를 탄생시킨 정씨를 상무로 영입했다. 이 쇼는 제일모직 브랜드가 된 ‘구호’의 사실상 첫 쇼였다. 》
○ 정제된 여성스러움 표현'
쇼가 끝난 며칠 후 서울 종로구 수송동 제일모직 사무실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짙은 초콜릿색 재킷과 밑단이 살짝 퍼지는 흰색 바지를 입은 그는 엄지 손톱만한 노란색 국화 세 개를 띄운 차를 냈다.
“꽃이 가라앉으면 드세요.”
들꽃을 좋아한다는 그의 차분한 말투와 그가 만드는 옷은 어딘가 닮았다.
“1960년대 이탈리아 영화 중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정사(L'Avventura)’에서 이번 쇼의 영감을 얻었습니다. 여성스러움을 강조하는 요즘 트렌드를 어떻게 모던하게 풀어낼까 고민하다가 이 영화를 떠올렸죠. 1960년대는 여성성의 시대였으니까요. 영화는 패션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이미지물입니다.”
정씨는 이번에 에르메스 켈리백 디자인을 다채롭게 변형한 핸드백, 무릎길이의 펜슬 스커트, 지프업 스타일 재킷, 짧은 모피 반코트 등을 통해 정제된 여성스러움을 표현했다.
사실 이번 쇼의 최대 관심사는 1990년대 후반 미니멀한 구조주의 의상으로 국내 패션계에 한 획을 그었던 ‘구호 스타일’과 대기업 스타일이 어떻게 만나 발현할지 여부였다. 쇼에서 만난 패션계 인사들은 “예전 ‘구호’에 비해 상업적 색채가 더해졌다”는 평을 내렸다.
○ “생명력이 긴 옷 만들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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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제일모직 브랜드의 ‘구호’는 1990년대 간결한 실루엣의 ‘구호’에 컬러감과 여성스러움을 덧입었다. 면이나 모 같은 자연 소재에 시폰과 실크를 덧대는 식이다.
“가장 기본적인 이미지가 클래식하다고 생각합니다. 10년 넘게 입어도 싫증나지 않는, 생명력이 긴 옷을 만들고 싶어요. 유학시절 친구가 입은 콤 데 가르송의 하얀 셔츠와 까만 바지에 반해 패션 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된 것 처럼요.”
마틴 마젤라, 요지 야마모토처럼 자신만의 뚜렷한 주관을 가진 디자이너를 좋아한다는 정씨 자신은 낡아서 오히려 멋스러운 갈색 토즈 드라이빙 슈즈, 수년 전 이탈리아의 한 상점에서 12만원에 샀다는 커다란 가죽 가방, 중학교 때부터 모은 40여개의 안경테들에 애착을 갖는다. ‘제 2의 블랙’이라고 생각하는 짙은 초콜릿색과 군청색을 고급스러운 색상으로 꼽는다.
“국내 패션은 지나치게 유행에 민감합니다. 요즘 유행인 진과 정장의 믹스 앤드 매치 스타일은 그 자체로 판박이 패션을 낳고 말았습니다. 옷은 때와 장소에 맞게 제대로 갖춰 입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은 패션의 자기 주체성을 모색 중인 시기인 것 같습니다.”
○ 하루 4시간 이상 안자는 ‘일벌레’
미국 휴스턴대에서 광고 미술, 파슨스 스쿨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영화 ‘정사’, ‘순애보’, ‘스캔들-조선남녀 상열지사’ 등의 프로덕션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또 무용가 안은미씨 등의 무대 디자이너로도 평가를 받았다. 디자인 작업 중에도 호주 르 코르동 블루에서 요리를 공부했으며, 뉴욕 업타운과 서울 청담동에서 오리엔탈 레스토랑을 운영하기도 했다.
미국 유학 시절부터 ‘일 벌레’로 통했기 때문일까. 아직 미혼인 그는 하루 4시간 이상 자지 않는다. 그의 사무실 책상 위에는 패션 서적 이외에도 해외 인테리어, 음식 잡지가 가득 쌓여 있다.
11월쯤에는 현대 무용가 안성수씨의 무대 예술도 담당한다. 몸에 표현되는 옷의 실루엣을 가장 중시하는 그는 인간 몸의 구성과 해체를 다루는 현대 무용가 사샤 발츠와 머스 커닝햄의 공연을 좋은 공연으로 추천한다.
문화 예술계 인사와 넓게 교류하고, 삼청동과 사간동 갤러리들에 자주 들르고, 오래된 여자 친구와 부산에서부터 속초까지 해안선을 따라 여행한다는 그의 소박한 일상을 듣다 보면 이것이 바로 지적인 ‘구호 스타일’인가 싶다.
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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