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역사와의 대화]<3>‘운계서원중건사실’

  • 입력 2004년 5월 17일 18시 57분


조선후기는 사림(士林)의 붕당(朋黨)정치가 일당 또는 일족 중심으로 운영돼 가는 시기였다. 각 세력은 자파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서원(書院)이나 사우(祠宇)를 건립했다. 당시 영남 남인은 숙종조 이후 정권에서 소외됐지만 강한 결속력을 통해 향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중 경북 안동 예안 지방은 퇴계학파의 본산이었다.

그런데 이 지역에 서인을 배향하는 서원을 세우려는 끈질긴 시도가 있었다. ‘운계서원중건사실(雲溪書院重建事實)’은 중앙 정계와 연결된 안동 예안의 노론계 세력이 1817년 이 지역에 율곡 이이(栗谷 李珥),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운계서원을 중건한 과정을 기록한 문건이다.

1719년 예안의 사림이 주동이 되어 율곡이 22세 때(1557년) 예안에 은거해 있던 퇴계를 방문한 사실을 들어 안동 도산서원 근처에 율곡의 사우를 세우려 했다. 1738년 예안 유림은 이 논의를 다시 강력히 제기했다. 당시 경상감사 유척기(兪拓基)와 안동부사 어일룡(魚一龍), 예안현감 이매신(李梅臣)은 서로 입장이 달랐지만 이 일을 막지는 않았다. 들보로 쓸 만한 목재를 구하지 못해 예안의 남인 명문가인 금수천(琴壽天)의 집안에 부탁하자 “이처럼 중대한 일에 어찌 들보로 쓸 목재를 아끼겠는가. 다만 향론이 일치하지 않으니 비난을 어떻게 감수할 것인가”라고 답변했다. 예안 사림 전체의 동의를 구하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김상헌을 배향하는 안동의 서간사(西澗祠)가 철거되자 예안의 사림도 이 일을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1817년 예안 유림은 다시 서원 건립에 합의했고, 서원을 세운 뒤 노론의 세력권에 든 안동 인근 유림단체의 협조 속에 위패 봉안식(奉安式)을 가졌다. 광해군을 적극 지지했던 정인홍(鄭仁弘)의 대북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 안동·예안 사림으로부터 줄곧 따돌림을 당해온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월천 조목(月川 趙穆)의 후손들이 이 일을 주동했다. 안동·예안의 수령과 경상감사도 측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운계서원중건사실’은 당시 노론이 “‘이 서원의 설립은 우리 당의 숙원이었다. 이제 일을 이루게 되었다’며 감회에 젖어 있었다”고 분위기를 전한다.

영남 사림의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1세기에 걸쳐 강행된 이 일련의 서원 건립 과정은 노론 집권층이 영남 남인 본거지의 향권을 장악하기 위해 얼마나 집요하게 노력했는지 잘 보여준다.

임노직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원·한국한문학


‘운계서원중건사실’에는 영남 남인의 본거지인 경북 안동·예안 지역에 노론계열의 서원이 세워지게 된 경위가 상세히 기록돼 있다. 당시 사림들간에 문화권력을 통한 정치권력의 확산 노력이 치열했음을 엿볼 수 있다.-사진제공 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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