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산책]‘하류인생’ 고단한 時代 짊어졌던 어깨를 보라

  • 입력 2004년 5월 20일 20시 07분


《‘장군의 아들’과 비슷한 액션영화다?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으로 예술적으로 인정받은 임권택감독이 작심하고 만든 흥행 영화다? 결론적으로 임 감독의 99번째 작품 ‘하류인생’은 이런 추측에 대해 ‘아니다’라도 대답하는 영화다. 현대사의 주요 장면이 등장하지만 이를 고발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액션이 매력적이지만 그렇다고 ‘액션 영화’도 아니다.》이 작품은 그 사연 많은 세상을 몸으로 부대끼며 살아온 한 남자의 이야기다. 아울러 그 시대를 영화감독과 자연인으로 겪어낸 임 감독의 ‘증언’이기도 하다.

고교생 태웅(조승우)은 친구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이웃 학교에 갔다가 승문(유하준)의 가족과 인연을 맺는다. 승문의 칼에 찔려 그의 집까지 쫓아간 태웅은 승문의 누나이자 연상인 혜옥(김민선)을 사랑하게 된다.

타고난 싸움 실력으로 명동의 ‘주먹’이 된 태웅은 4·19, 5·16, 10월유신 등 격동기를 거치면서 영화 제작자와 군납업자로 변신한다.

영화는 실제 임 감독이 연출한 반공영화 ‘증언’ 간판을 등장시키면서 당시의 열악한 영화제작 환경, 겹치기 출연한 여배우의 에피소드, 검열의 폐해, 결혼한 혜옥과의 갈등, 군납업을 둘러싼 권력과의 뒷거래를 빠르게 보여준다.

임 감독은 재미를 부풀리거나 과장된 액션으로 영화의 흥행성을 높이기보다는 자신을 포함한 이 시대 아버지들이 살아온 삶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정공법’을 선택했다. 흥행 영화를 만들려고 작정했다면 더 과장된 액션과 드라마틱한 구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태웅의 청춘에는 카리스마나 판타지 같은, 영화의 주인공이라면 관객에게 줄 법한 ‘선물’이 철저하게 빠져 있다. 심지어 “굶어죽어도 다시는 남의 밑에서 일 안 할 거야”하고 독기서린 절규를 한 뒤에도 다시 무릎을 꿇는 소심한 생활인으로 돌아갈 뿐이다.

현대사의 주요 장면과 태웅을 둘러싼 에피소드가 질주하듯 빠르게 교차하는 화면은 시대와 그의 삶이 엇박자로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여준다. 정치적 상황은 태웅의 생활을 고단하게 만드는 것일 뿐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이어지지 않는다. 격류에 휩쓸려 반성 없이 살아온, 그래서 하류인생들인 것이다.

임 감독은 ‘장군의 아들’ 시리즈에서 액션 연출이 자신의 남다른 장기임을 보여줬지만 이번 영화는 액션에서조차 ‘기름기’를 쏙 빼버렸다. 초반부는 보기 드물게 격렬하고 사실적인 액션으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지만 더 이상 볼거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몇 차례 액션 신이 이어지지만 난투극이 돼 버리고 주인공 태웅조차 때리고 맞는 싸움에 파묻힐 뿐이다.

‘춘향뎐’으로 데뷔한 조승우는 ‘클래식’ ‘후 아 유’에서 보여준 감성적 멜로 연기에 이어 세파에 찌든 한 남자의 삶을 액션과 눈빛으로 제대로 담아냈다. 김민선도 극중 혜옥이라는 이름에 다른 배우의 얼굴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안성맞춤의 연기를 해냈다.

‘99번째 영화의 계단’ 위에서 임 감독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이제 ‘영화적인 영화’보다는 ‘삶에 가까운 영화’를 한 편 보여주고 싶었을지 모른다.

21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김갑식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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