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룡의 부부클리닉]"알아서 해"…대화 끊긴 소모전

  • 입력 2004년 5월 23일 17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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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지 10여년 되는 부부가 진료실을 찾았다.

부인은 혹시 자신들이 권태기에 들어선 것인가를 물어왔다. 남편이 대화를 꺼린다는 것이다. 의견을 물었을 때 남편은 알아서 하라며 관심이 없다. 그러나 자신의 작은 잘못에도 질책을 한단다. 남편의 잘못에 대해 말할 때는 아예 귀를 닫는다고 한다.

남편의 얘기를 들었다. 남편은 자신들은 대화를 할 줄 모르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아예 피해버린단다. 만약 대화기술을 배우면 부부 관계가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좀 더 자세한 얘기를 들어봤다.

남편은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적당한 선에서 멈추기를 바랐다. 그는 아내처럼 기억력이 좋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아내는 과거의 일까지 들추어낸다. 자신은 기억나지 않는 일까지 따지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힘만 든다는 것이다. 그만 하자고 해도 아내가 화를 내 싸움이 커진다고 했다.

부인은 문제가 생기면 정확하게 매듭을 지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늘 매사를 적당히 넘어가려고 한다. 일을 해결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것을 못 보는 성격 때문에 남편과 싸운 적도 여러 번이다. 그래서 요즘은 남편이 기분 좋을 때를 기다려 말을 하는 편이다. 그런데 그때마다 남편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발뺌을 하니 화가 난다는 것이다. 남편이 자신의 말에 적절한 반응을 보여주면 싸울 일도 없다고 부인은 말했다.

대체로 여자의 기억력은 남자보다 뛰어나다. 그러나 잘못 사용하면 ‘판도라의 상자’처럼 부부관계에 위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판도라의 상자’에는 ‘희망’도 함께 들어있다. 이 부부도 희망을 찾았다.

치료를 받으면서 부인은 남편이 자신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줘 멋있게 보였던 기억들을 찾아냈다.

그리고 남편은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고 있는 부인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고 더 잘 해 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찾았다. 부인의 요구가 따지려는 의도에서 나온 게 아니란 것을 이해하자 더 이상 대화를 피하지도 않았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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