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회 칸 국제영화제 폐막식이 열린 23일 새벽(한국시간) 뤼미에르 극장. 심사위원장인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이 영화에 심사위원대상을 주게 된 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유별나게 강한 영화적 악센트로 수상작을 호명했다.
이어 ‘올드 보이’(제작사 쇼이스트·에그필름)의 박찬욱 감독은 검정색 턱시도 차림의 밝은 표정으로 주연 배우 최민식과 함께 무대에 올라 이렇게 입을 열었다.
“위대한 거장이 빌어준 행운의 효력이 있어 상을 받은 것 같다.”
최근 칸에서 열린 한 파티에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을 만난 것을 빗댄 말이었다. 그는 또 “한국의 위대한 배우 최민식 유지태 강혜정에게 영광을 바친다”며 출연배우들에게 공을 돌렸다. 이어 최민식은 “올드보이가 상을 타게 도와준 죽은 네마리의 낙지에게 감사의 말과 함께 명복을 빈다”고 말해 폭소와 함께 큰 박수를 받았다.
☞'올드보이' 영화정보 | 박찬욱 감독 - 최민식 인터뷰 기사 | 최민식 프로필 | 유지태 프로필
시상식 리셉션 직후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박 감독은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염세주의자로서 한 마디 한다면 이제 내 인생에는 내리막길밖에 없는 셈”이라고 농담을 던졌다. 그는 그만큼 여유와 당당함을 보였다.
―수상을 예상했나.
“왕자웨이,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 등 대가들이 워낙 많아 꿈도 못 꿨다.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만으로도 영화인으로서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됐을 때도 사람들이 황금곰상(대상)을 받을 것 같이 말했지만 수상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
―어떤 점을 인정받았다고 생각하나.
“칸 영화제는 그동안 아시아 영화들에 대해 오리엔탈리즘이라고나 할까, 이국적 볼거리를 중시했다. 이는 서양인들이 아시아 영화에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올드 보이’는 그 단계를 넘어 서양인들이 스스로 능숙하게 다룬다고 생각하는 장르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박 감독은 장르영화의 문법을 뒤집고 배반하면서 새로운 영화 만들기에 치중해 왔다. 컬트적 스타일로 소수 영화 팬들에게 지지를 받았던 그는 ‘공동경비구역 JSA’로 전국 580만 명의 관객을 끌어들이며 흥행감독으로도 입지를 굳혔다. 그러나 ‘복수는 나의 것’이 흥행에 참패한 후 그는 예술적 취향과 대중성을 접목시킨 회심작을 내놓았다. ‘올드 보이’가 그것이다.
―행운의 연속이다. 당초 비경쟁 부문에 올랐던 영화가 경쟁 부문으로 옮겨가고 큰 상도 받았는데….
“나 스스로 왜 그랬는지 칸에 물어보고 싶다. (웃음) 칸에 올 정도의 전형적 예술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이 영화를) 특이하게는 생각하겠다’ 정도였다. 칸에서 박찬욱이란 이름은 금시초문이었을 것이다. 경쟁부문 진출이 확정되고 ‘칸의 안목이 많이 좋아졌구나’ 생각했다. (웃음)”
칸에 머물고 있는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는 “미지의 젊은 감독이 거장들과 작품으로 경쟁을 벌여 2등상을 받았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며 “이번 수상으로 박 감독은 신예 감독을 발굴해 세계적 인물로 키워온 칸 영화제의 총아로 떠오른 만큼 앞으로 황금종려상을 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셈”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수상이 앞으로 작품세계에 미칠 영향은.
“별다른 변화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몇 편쯤 흥행이 안 될 때에도 (투자받는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웃음).”
―‘올드 보이’가 호명된 후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은.
“아내(김은희·40)였다. ‘복수는 나의 것’을 찍고 난 후 사실 또 다른 복수극을 만드는데 좀 주저했다. 그때 아내가 하라고 부추겼다. 시상식 직후 아내에게 ‘고맙다’고 했더니 아내가 ‘내 공을 잊지 말라’며 웃더라. 아내가 아니었으면 ‘복수 3부작’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박 감독은 “촬영장에서 좋은 배우들과 일하며 카메라가 돌아갈 때는 눈앞에 상상도 못할 일이 펼쳐진다”며 “인생에서 가장 긴장되면서도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했다. 차기작으로 그는 ‘복수 3부작’의 완결편인 ‘여성판 복수극’과 아울러 ‘박쥐’라는 제목의 흡혈귀 영화도 준비 중이다.
이승재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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