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국주(申國柱) 전 동국대 총장은 1911년에 출간된 사진첩 ‘일본의 조선(日本之朝鮮)’에 나란히 실린 대안문과 대한문의 사진을 30일 처음 공개했다.
1910년의 한일병합을 기념해 나온 이 사진첩에는 1905년경 대안문을 나서는 고종의 출궁행렬과 1906년 순종의 가례식 때 대한문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나란히 실려 있다. 1902년 고종이 경운궁을 중건하면서 처음 세웠을 때는 현판이 대안문이었으나 경운궁이 화재로 불탄 뒤 1906년 재건됐을 때는 대한문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문화재청은 6월 1일부터 대한문의 보수공사에 들어간다.
한편 대안문이 대한문으로 바뀐 데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당시의 학자 황현(黃玹·1855∼1910)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고치고, 안동으로 도읍을 옮기면 국운이 창성할 것이라는 전 비서승 유시만의 도참설을 믿고 고쳤다”고 기록했다. 대안문 중 ‘안(安)’자가 갓 쓴 여인 모양으로 갓을 쓴 여자가 이 문을 드나들면 나라를 망칠 것이란 뜬소문이 돌자 이를 달래기 위해 고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고종을 비하하기 위해 친일대신 남정철(南廷哲)을 시켜 ‘안’자를 악한(惡漢)에서처럼 ‘놈’을 뜻하는 ‘한(漢)’자로 바꿨다는 설도 있다.
신 전 총장은 “대안문이 대한문으로 바뀐 데에는 망국의 슬픈 사연이 깃들어 있다고 말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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