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역사와의 대화]<5>급문록영간시일기

  • 입력 2004년 5월 31일 18시 46분


경북 안동시 도산서원(陶山書院)의 서고인 광명실(光明室)에 보관돼 있다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옮겨진 자료 가운데 ‘급문록영간시일기(及門錄營刊時日記)’가 있다. 가로 22.5cm, 세로 36cm의 총 10쪽에 불과한 이 낡은 필사본 자료는 문인록(門人錄)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흔치 않은 자료다. 게다가 조선 중기의 대학자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문인록 간행 과정을 담고 있어 더욱 의미가 크다.

1913년 4월 17일부터 6월 13일까지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것인데, 굳이 ‘급문록’이라 한 것은 혼자 마음속으로 따르며 책을 읽어 스승으로 모신 사숙(私淑)이 아니라 직접 그 문하에 나아가 대면하고 배웠다는 의미다.

먼저 문인록 간행을 위한 당회(堂會)가 소집돼 안건이 통과되면 문인들의 후손 집안에 문인록 간행 사실을 알리는 통문을 보냈다. 통보받은 후손들은 자료 혹은 의견을 갖고 다시 모였는데, 생각이 같을 리 없었다. 일기에는 “여러 논란들이 한 가지로 모아지기를 기다렸다가는 진실로 기약이 없을 것이다” 등의 어려움이 기록돼 있다.

이렇게 해 겨우 자료가 수습되면 작업은 기초 자료의 교감(校勘), 등사(謄寫), 감사(監寫), 판각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역시 급문 사실에 대한 판단이었다. 혹자는 자신의 선조가 빠졌다고 항변하거나 서술 내용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너무 짧게 서술됐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었다. 교감은 3차에 걸쳐 진행됐으나 여전히 문제가 발견됐다. 일기에는 “그들은 서로 경계하기를, 이 교감본이 후에 정본이 될 것이니 교감을 소홀히 할 수 없다며 정밀하게 살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내용 중에는 일본 군대가 간행소에 난입해 목판을 조사하고, 이튿날에는 또다시 일본 민간인이 찾아와 본국에 갖고 가고 싶다며 퇴계의 유묵(遺墨)을 청하는 등의 웃지 못 할 일들도 기록돼 있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였던 것이다. 막 국권을 일본에 빼앗긴 채 방황하며 자신들의 학문과 사상의 뿌리를 다시금 확인하고자 했던 식민지 유학자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엿볼 수 있다.김종석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동양철학

‘유교 10만 대장경’ 수집운동

한국국학진흥원과 동아일보가 함께 ‘유교 10만 대장경’ 수집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각 문중에서 보관 중인 목판을 위탁받아 현대적 보존시설을 갖춘 국학진흥원 내 장판각(경북 안동시 도산면)에 정리 보관합니다. 054-851-0768


일제 강점 직후인 1913년 퇴계문하의 문인록 편찬 과정을 기록한 ‘급문록영간시일기(及門錄營刊時日記)’. 국권을 빼앗긴 뒤 정신적 방황 속에서 자신들의 사상적 뿌리를 다시 확인하려 했던 식민지 유학자들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사진제공 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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